전쟁은 사랑을 어떻게 파괴하는가…'한낮의 열기' 국내 초역

연합뉴스 2025-01-13 00:00:19

노벨문학상 거론됐던 영국 엘리자베스 보엔 소설 국내 첫선

한낮의 열기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그가 맡고 있는 일의 핵심이 적에게 흘러가고 있어요. 상당히 오랫동안 그런 의심을 받았고, 이제 기정사실로 알려졌죠."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9월 첫 번째 일요일 오후 런던. 스텔라 로드니는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하는 말을 듣고 혼란에 빠진다. 해리슨은 스텔라의 연인이자 군인인 로버트가 적군에 정보를 흘리고 있다고 말한다.

주인공 스텔라는 40대의 지적인 여성이다. 남편은 스텔라와 이혼한 직후 세상을 떠났고 올해 스무 살인 아들은 군에 입대해 전쟁터로 갔다. 로버트는 프랑스 됭케르크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이며 2년째 스텔라와 교제 중이다.

그런 스텔라에게 해리슨은 로버트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을 빌미로 자신과 깊은 관계로 발전할 것을 제안한다. 해리슨은 지극히 예의 바른 태도로 말하면서도 실상은 약점을 잡고 스텔라를 협박한다.

스텔라는 그런 해리슨의 말을 믿고 싶지 않지만, 세상이 전쟁의 포화로 뒤덮인 상황이라 마냥 흘려들을 수는 없다. 연인인 로버트가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스텔라는 자신의 감정과 도덕적인 선택 사이 고민에 빠진다.

스텔라는 로버트의 정체를 직접 알아내려 하는데, 그에 대해 알아내려 하면 할수록 로버트가 숨기는 게 많다는 것을 느낀다.

영국 소설가 엘리자베스 보엔(1899∼1973)의 대표작으로 최근 국내에 처음 번역 출간된 장편 '한낮의 열기' 줄거리다.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서 작가는 각 인물이 전쟁이라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신뢰와 사랑을 어떻게 대하는지 다룬다. 아울러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이 개인의 삶과 사랑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준다.

'한낮의 열기'는 독특한 문체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영국 런던을 효과적으로 표현했으나 이런 특징 때문에 다소 난해하게 읽힌다. 배경 묘사가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문체가 난해한 데다 일부 문장은 인물의 심리와 그가 있는 장소에 대한 묘사가 뒤섞여 있다.

예를 들어 작가는 스텔라와 해리스가 대화하다가 침묵하는 장면을 "창가에 말없이 서 있던 두 사람은 그들이 바라보는 도시만큼이나 익명의 존재가 되었다"고 표현해 문장을 여러 차례 곱씹게 했다.

이 책을 번역한 정연희 번역가는 '역자 해설'에서 "'한낮의 열기'를 읽고 옮기는 과정은 처음부터 거의 끝까지 안개가 자욱하고 포연이 묻은 런던의 거리를 걸어가는 느낌이었다"고 털어놨다.

또 "문학 작품이 분명하거나 실제적이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보엔의 작품을 읽는 경험은 문장 구성, 문체, 내용 모두에서 그것이 작가의 의도인 것처럼 더 모호하다"고 덧붙였다.

보엔은 '한낮의 열기' 외에도 '호텔', '마음의 죽음' 등 여러 작품에서 지적이고 날카로운 언어로 인간관계와 심리를 섬세하게 탐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낮의 열기'는 보엔의 실제 경험을 일부 반영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은 보엔은 생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1970년에는 '에바 트라우드: 또는 변하는 장면들'로 부커상 후보로 올랐지만, 국내에 그의 작품이 번역 출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연희는 "보엔의 소설을 심도 있게 들여다보면 지금까지 묻혀 있던 것이 의아할 정도로 문학사에서 그만의 특유한 위치와 탁월한 작품성이 엿보인다"고 평가했다.

열린책들. 576쪽.

jae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