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집 '나직이 불러보는 이름들'·시집 '그 끝은 몰라도 돼'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 금지된 일기장 = 알바 데 세스페데스 지음. 김지우 옮김.
김연수는 소설 '꾿빠이, 이상'에서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라고 썼고, 다자이 오사무는 '사양'에서 비밀을 "다른 생물에게 없고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비밀이 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1950년 11월 26일 새 공책에 일기를 쓰는 마흔세 살의 이탈리아 주부 발레리아에게 비밀은 낯설게만 느껴진다.
발레리아는 일요일 아침 담배 가게에 갔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공책을 사려 하는데, 가게 주인으로부터 "금지된 일이라 안 된다"는 대답을 듣는다. 공정한 경쟁을 위해 일요일엔 담배 가게에서 담배 외의 물건을 팔 수 없도록 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이다.
별로 공책이 필요하지도 않았던 발레리아는 '금지된 일'이라는 말에 오히려 마음이 끌려 가게 주인에게 애원하고, 결국 공무원들의 눈을 피해 공책을 몰래 사서 일기장으로 쓰기로 한다.
발레리아는 첫 일기에 "나는 비밀을 만들기 싫다"고 쓰지만, 일기장에 자신의 은밀한 감정과 생각을 기록하면서 차츰 누군가의 딸, 아내, 엄마가 아닌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이탈리아 소설가 알바 데 세스페데스(1911∼1997)의 장편 '금지된 일기장' 줄거리다. 국내 독자들에겐 생소하지만, 외국에선 페미니즘 문학에 영향을 미친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한길사. 440쪽.
▲ 나직이 불러보는 이름들 = 이동순 지음.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 가요 연구가인 이동순 작가가 유년 시절부터 등단, 대학 교수 재직 시절, 정년퇴직 후의 집필 활동까지 지나온 길을 담은 산문집이다.
경어로 쓰인 이 책은 "나는 조부님을 그 누구보다도 존경합니다"라며 일제강점기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 단장이었던 조부 이명균(1863∼1923)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본가임에도 독립운동에 헌신한 조부, 작가가 태어난 지 열 달 만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 생계가 어렵던 시절 가정교사 자리를 마련해준 교수, 학교 도서관에서 은백양나무를 내려다보며 고뇌하던 문학청년 시절 등 오늘날 작가 이동순을 있게 한 모든 것이 망라됐다.
출판사는 이 책을 "이동순이 문학으로 만난 지난 반세기의 인연들을 총망라한 글이자 지난 세월 만나온 사물, 작품, 지명, 노래 등의 고유명사들을 하나씩 재생하는 애틋한 복원 작업"이라고 소개했다.
문학동네. 412쪽.
▲ 그 끝은 몰라도 돼 = 문정희 지음.
"사랑시집은 퇴폐와 멸망이 담긴 상처 박물관 / 자 쏠 테면 쏴라! 홀딱 벗고 기어가는 별 /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어요 / 제발 마실 물 좀 주세요"(시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어요' 에서)
문정희 시인(국립한국문학관 관장)에게 사랑시집은 퇴폐와 멸망이 담긴 상처 박물관이다. 시인은 '쏠 테면 쏘라'는 심정으로 '홀딱 벗고' 자신의 박물관 문을 연다.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시인은 60년 넘는 세월 동안 안주하지 않고 도발적이고 과감한 자신만의 언어를 쌓아왔다.
침묵보다는 따가운 일침으로, 관조보다는 날카로운 성찰로 눈과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시 47편이 실렸다.
"사람에게서 나오지만 자연의 비명 소리 / 이것이 시일까. / 흐르는 물을 손으로 움켜쥘 수 없듯이 / 처음이 곧 마지막인 / 생명은 뜨거움과 아픔만이 증거이다."('시인의 말' 에서)
아침달.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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