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샷!] 이름없는 천사들…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

연합뉴스 2025-01-10 00:00:34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하라'는 익명 기부

불특정 다수 자선냄비부터 수억원 거액까지…조용히 나눔실천

25년째 이어온 전주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

(서울=연합뉴스) 오인균 인턴기자 = "기부자 예우 제도가 있어도 극구 거절하시는 익명 기부자들이 있어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순수한 마음이 익명 기부의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익명의 기부를 종종 받는 서울 지역 한 대학교 대외협력처 관계자는 신원을 밝히길 원하지 않는 기부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각박하고 추운 세상을 훈훈하게 데우는 기부는 아무리 박수를 보내도 모자란다. 그런데 이러한 독지가 중에서는 한사코 신분을 밝히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거액을 쾌척하면서도 자신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심심치 않다.

9일 경기 가평군 청평면사무소에 따르면 한 익명의 독지가가 지난 9년간 해마다 수백만원씩 기부했다.

중후한 모습의 이 남성은 2016년부터 매년 1~2차례 청평면사무소를 찾아 매번 '작은 물질이지만 지역의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고 싶습니다'라고 적힌 메모지 한장과 100만∼1천만원씩 기부했다.

지난 3일에도 500만원을 기부한 이 남성은 16차례에 걸쳐 총 8천117만7천870원을 기부한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그는 신원을 밝히지도, 차 한잔하자는 제안도 마다해왔다.

청평면사무소에서 오래 근무한 직원은 짐작하는 바가 있지만 이 남성의 뜻을 존중해 굳이 알리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6일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익명 기부자가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피해 지원에 써달라며 성금 1천만원과 손편지를 모금회 모금함에 두고 갔다고 밝혔다. 편지에는 '약소한 액수지만 유가족분들을 위해 사용되길 바랍니다. 힘내십시오'라고 적었다.

이 기부자는 2017년부터 매년 연말연시와 각종 재난시 성금을 보냈으며 누적 기부액은 6억8천만원에 이른다고 모금회는 전했다.

그는 지난달에도 모금회 사무국 앞에 현금 6천54만7천260원을 놓아두고는 발신자 번호 표시가 제한된 전화로 이를 알렸다. 기부금과 함께 전해진 편지를 통해 "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고위험 신생아·조산아, 저체중 아기들이 잘 성장하는 데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모금회 관계자는 "손편지를 비롯해서 같은 기부자임을 알게 하는 패턴이 있다"면서 "익명으로 기부하는 취지를 최대한 존중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신분을 파헤치고 있진 않다"고 말했다.

익명 기부자가 놓고 간 현금과 손 편지

지난달 20일 전북 전주시에는 2000년부터 25년째 선행을 이어오며 '얼굴 없는 천사'라 불리는 독지가가 어김없이 찾아왔다.

노송동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 센터 부근에 성금을 두고 간다고 전한 그는 A4 복사 용지 박스 안에 현금다발, 돼지저금통, 편지를 두고 사라졌다. 편지에는 "소년·소녀 가장 여러분 따뜻한 한 해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썼다.

이날 발견된 성금은 8천3만8천850원. 이 독지가가 지금까지 보내온 성금은 10억4천483만6천520억원에 달한다.

전주시는 이 독지가의 선행을 본받고 그 뜻을 널리 알리고자 인봉로 일부 구간을 '얼굴없는 천사의 거리'로 지정했다.

자선냄비에 익명으로 전달된 1천500만원과 편지

이뿐만이랴. 얼굴 없는 천사는 전국 어디에나, 거리 곳곳에 있다.

구세군 자선냄비는 지난 90여년간 거리에서 종을 울리며 십시일반 '불특정 다수'의 마음을 모아왔다.

동전부터 1천원·5만원권에 수표까지 이름을 남기지 않는 수많은 익명의 천사들이 매년 자선냄비를 데웠다.

지난달 29일에는 경복궁역 자선냄비에 한 여성이 찾아와 1천500만원을 넣고 갔다.

그가 함께 건넨 편지에는 "30살 생일을 맞이하여 이렇게 기부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며 "앞으로 남은 생은 제가 받아온 사랑을 나누며 살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구세군 관계자는 기부자가 자신의 인적 사항이나 구체적인 기부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고 전했다.

손 맞잡는 자원봉사자와 유가족

지난달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이후 피해자 가족을 위한 많은 구호 물품도 '보내는 이' 없이 답지했다.

익명의 서울 시민이 보낸 핫팩 1만개, 충남 당진 시민이 보낸 약품 20박스 등 전남도에 접수된 식료품과 생필품은 7천400건으로 집계됐다.

지난 5일 전남도 관계자는 "이름을 밝힌 개인·기관만 현황이 파악된다"며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기부자와 봉사자들이 활동했다. 개인정보 보호로 인해 일일이 밝히지 못한 점 양해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새해 첫날 사랑의 온도탑 나눔온도는…

선행은 널리 알릴 수록 좋을 듯한데 이름을 숨기는 이유는 뭘까.

10년째 익명으로 다양한 기관에 기부해 온 직장인 이모(41) 씨는 "누가 후원했는지 알게 되면 그들(수혜자)에게 부담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면서 "비밀이 지켜질 때 감동이 오래 유지될 것 같다"고 말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인정받고 싶은 심리 이면에는 오히려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피하는 마음이 있다"면서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도 남을 도울 수 있다면 기부의 파급효과가 더 커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기부자에 대한 일부 왜곡된 시선이 신분을 감추게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모금가협회 황신애 상임이사는 "기부자 신분이 밝혀지면 주변 사람이 일면식 없는 남을 왜 도와주느냐고 해서 익명으로 기부하기도 한다"면서 "기부자에게 지나치게 높은 도덕적 잣대를 대거나 불필요한 판단을 하기보다는 기부 행위 자체에 대해 칭찬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름을 밝히든, 숨기든 기부가 가슴을 적시는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분명하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관계자는 "익명이든 아니든 거액을 쾌척하는 선행이 알려지면 기부금 액수가 늘기도 한다"고 밝혔다.

kuu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