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의 눈에 비친 인간…세풀베다 '바다를 말하는 하얀 고래'

연합뉴스 2025-01-07 10:00:11

'연애 소설 읽는 노인' 작가가 남긴 마지막 동화

바다를 말하는 하얀 고래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느림보 거북이도 다른 거북이를 공격하지 않는다. 탐욕스러운 상어도 다른 상어를 공격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에서 자기와 비슷한 이들을 공격하는 종은 인간밖에 없는 것 같다."

남미 최남단의 바다를 누비는 달빛 향유고래는 미지의 존재인 인간을 오랜 세월 관찰한다. 처음 널빤지를 엉성하게 엮어 만든 배를 타고 위태롭게 바다로 나왔던 인간은 점점 더 큰 배를 타고 대담하게 바다를 누빈다.

인간은 힘과 욕망을 키워가며 차츰 고래들을 위협한다. 향유고래는 인간이 던진 작살에 맞아 죽어가는 다른 고래를 발견하고, 얼마 뒤에는 인간들이 서로의 배를 향해 포를 발사해 죽고 죽이는 광경을 목격한다.

인간 중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바로 칠레 해변에서 허락된 최소한의 것만 자연에서 취하고 살아가는 부족 '라프켄체'다.

고래들은 태초부터 라프켄체 사람들과 특별한 약속을 맺었다. 이 부족에서 누군가 죽으면 그 시신을 고래들이 자유로운 세계로 향하는 수평선 너머로 인도한다.

달빛 향유고래는 라프켄체 부족의 시신을 인도하는 고래들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는데, 탐욕스러운 고래잡이들이 나타나 이들을 집요하게 추격한다.

칠레 출신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

칠레 출신 소설가이자 동화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1949∼2020)의 동화 '바다를 말하는 하얀 고래' 줄거리다.

세풀베다는 피살된 환경운동가 치코 멘데스를 기리는 장편소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으로 유명한 작가다. 그는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투병하다가 2020년 4월 세상을 떠났다.

'바다를 말하는 하얀 고래'는 2019년 5월 발표된 세풀베다의 유작이다. 고래의 시선으로 바라본 인간의 잔혹함과 탐욕, 이를 향한 고래의 분노를 간결하면서도 서정적인 문장으로 그려냈다.

세풀베다는 어린 시절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가장 좋아하는 소설로 꼽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다를 말하는 하얀 고래'는 '모비 딕'과 같은 사건을 자연의 눈으로 바라보는 작품이다.

이 동화 속 화자로 등장하는 달빛 향유고래는 모차 섬 근처에서 나타난다는 이유로 '모차 딕'이라고 불린다. 수많은 고래잡이배를 침몰시킨 포악한 고래로 이름을 떨쳤다.

책을 우리말로 옮긴 엄지영 번역가는 "이 책은 파타고니아 앞바다에서 어느 한 고래가 벌인 생존과 자유를 위한 투쟁의 기록인 동시에 자연과 생명의 힘을 그린 한 편의 대서사시"라고 설명했다.

열린책들. 144쪽.

jae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