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부터 주황색 제작…비행사고시 충격 견뎌
정식명칭은 비행기록장치…비행자료·조종실 음성 기록
(서울=연합뉴스) 구정모 기자 = 최근 제주항공 참사의 원인 규명에 있어 핵심 역할을 하게될 블랙박스의 모습을 보면 '블랙'(black)이라는 명칭과 달리 실제로는 주황색이다.
언론 등에서는 이 블랙박스를 두고 '비행기록장치'(FDR)라고도 하고 '음성기록장치'(CVR)라고도 부른다.
그렇다면 비행기 블랙박스는 언제 주황색으로 바뀌었고, 구체적으로 어떤 장치를 일컫는 것일까.
◇ 블랙박스는 원래부터 '주황색'
관련 기록을 찾아보면 비행기 블랙박스는 애초부터 주황색으로 만들어졌고, 이후 관련 규정에서도 블랙박스를 주황색으로 제작하도록 정하고 있다.
현대적 형태의 블랙박스를 발명한 사람은 호주의 데이비드 워런 박사로 꼽힌다.
호주 국방부 산하 연구소인 국방과학기술그룹(DSTG)과 호주국립박물관에 따르면 DSTG의 전신인 항공연구소(ARL)의 연구원이었던 워런 박사는 세계 최초 상용 제트 여객기인 코멧 여객기가 1953년 추락한 사고의 조사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블랙박스를 고안하게 됐다.
당시 워런 박사는 사고 직전에 항공기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록된 장치가 있었다면 사고 원인 파악에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몇 주 전 무역박람회에서 봤던 음성 녹음 장치가 떠올라 이를 항공기에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워런 박사는 이런 장치의 필요성을 주장한 보고서를 작성했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자 1957년엔 직접 시제품까지 만들었다. '항공연구소 비행 메모리 장치'(ARL Flight Memory Unit)라고 불린 이 장치는 4시간 분량의 음성과 각종 계기판 수치를 저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워런 박사의 이런 노력은 여전히 호주 당국으로부터 큰 관심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외국에서 환대받았다.
1958년 ARL을 방문한 영국의 항공등록위원회(현 민간항공기구)의 로버트 하딩엄 경이 블랙박스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해 워런 박사를 영국으로 초청했다.
영국에선 워런 박사의 블랙박스를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간 항공기에 비행기록장치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했다.
이후 다른 나라도 블랙박스를 항공기 필수 설치 장치로 채택했다.
현재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의 '국제민간항공협약 부속서'에 따르면 블랙박스는 '눈에 띄는 주황색'(distinctive orange colour)으로 제작하게 돼 있다.
우리나라의 관련 고시인 '운항기술기준'에서도 블랙박스의 색은 '밝은 오렌지 또는 밝은 황색'으로 규정돼 있다.
게다가 양 규정 모두 위치 수색이 용이하도록 빛을 반사하는 성질을 가진 재료로 블랙박스를 만들도록 정해놓았다.
결국 블랙박스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주황색을 유지해 온 셈이다.
그럼에도 주황색인 블랙박스가 '검은 상자'로 불리게 된 데에는 여러 설이 있다. 그중 공학 분야 용어인 '블랙박스'가 주는 신비스러운 느낌 때문에 사고 원인 규명의 핵심 장치를 일컫는 말로 채택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공학에서 쓰이는 블랙박스는 전기회로나 기계장치에서 그 내용을 문제 삼지 않고 원인과 결과 또는 입력과 출력만을 다룰 때의 과정이나 회로, 장치의 부분을 의미한다.
◇ 정식명칭은 비행기록장치…비행자료·조종실 음성 기록
블랙박스의 정식 명칭은 '비행기록장치'(Flight Recorder)다. ICAO의 부속서와 우리나라의 운항 기술기준에 따르면 비행기록장치는 "사고/준사고 조사에 도움을 줄 목적으로 항공기에 장착한 모든 형태의 기록 장치"를 말한다.
비행기록장치는 비행자료기록장치(FDR·Flight Data Recorder), 조종실음성기록장치(CVR·Cockpit Voice Recorder), 비행 이미지 기록장치(AIR·Airborne Image Recorder), 데이터통신 기록장치(DLR·Data Link Recorder) 중 하나 이상으로 구성된다.
통상 블랙박스라고 하면 이 가운데 비행자료기록장치(FDR)와 조종실음성기록장치(CVR)를 가리킨다. 우리 언론에서 FDR를 비행기록장치라고 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비행자료기록장치가 맞다.
FDR는 항공기가 이륙활주를 시작한 때부터 착륙활주를 끝낼 때까지 비행경로와 속도, 비행자세, 엔진 추력·출력, 운항 등과 관련한 정보를 기록한다.
김종현 당시 국토교통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 사고조사관이 작성한 '항공기 비행기록장치에 대한 이해'(2022)에 따르면 FRD에 기록되는 정보의 개수는 항공기 기종에 따라 200개에서 1천개 이상에 달한다.
쉽게 말해 FDR에 기록된 정보를 판독해 보면 항공기가 어느 경로로 어떻게 비행했는지, 조종사가 어떻게 조종했는지, 항공기 상태는 어떠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얘기다.
CVR는 비행 전 조종실 점검(cockpit check)이 시작하는 때부터 비행 후 조종실 점검이 마무리될 때까지 기내 무선설비로 송수신되는 음성통화, 조종실 내의 모든 소리, 내선 통화 장치를 사용한 조종사와 승무원 간 음성통화, 기내 승무원의 방송 내용 등을 저장한다.
항공안전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모든 여객기엔 FDR는 25시간 이상, CVR는 2시간 이상을 기록하게 돼 있다. 이에 따라 통상 FDR는 작동이 멈추기 전 또는 사고 발생 전 25시간, CVR는 2시간 분량의 자료를 저장한다.
◇ 비행기 추락과 화재에 견딜 수 있게 설계
블랙박스는 사고 원인 규명이란 취지에 부합할 수 있게 비행기 사고 시 비교적 충격이 작게 전달되는 기체 후방에 설치된다. 또한 항공기 사고 충격에 견뎌낼 수 있게 설계된다.
운항 기술기준에선 "비행기 추락과 화재에 대해서도 저항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유럽민간항공시설기구(EUROCAE)에서 발행한 충돌 보호용 항공기 기록시스템의 최소성능 표준 등을 따른다.
예컨대 순간 가속도 3천400g(1g=9.8㎨)의 충격에 견딜 수 있고, 섭씨 1천100도에서 60분간, 260도에선 10시간 버틸 수 있어야 한다.
전투기 조종사가 경험하는 최대 가속도가 약 9g 정도임을 감안하면, 3천400g는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수준이다.
또한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하는 경우에 대비해 블랙박스엔 수중 위치 전파 발생기가 장착된다.
이 장치는 물과 접촉하게 되면 자동으로 주파수가 37.5㎑인 음파를 발생하도록 작동한다. 과거엔 이 장치의 배터리 성능 기간이 30일이었는데 2018년부터는 최소 90일간 작동할 수 있도록 규정이 변경됐다.
블랙박스 구성 장치 가운데 FDR를 판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까닭은, FDR에 정보가 2진수(0과 1)로 기록된 탓이 크다. 즉, 비행 관련 각종 정보가 0과 1의 연속된 수치로 나열돼 있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어떤 정보의 값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사전에 설정된 규칙에 따라 2진수 정보를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값으로 변환한 뒤 이렇게 확보된 비행기 운항 관련 수치를 바탕으로 실제 비행기가 어떻게 운항했는지를 분석한다.
FDR의 분석은 통상적으로 3개월가량 걸리는데 이번 참사의 경우 FDR에 손상이 있어 이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pseudoj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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