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건축가 김원의 세상 이야기(20) 꿈의 바이칼-④

연합뉴스 2025-01-04 00:00:33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김원 건축가

바이칼호의 부르칸 바위에 도착했다.

이것이 바로 세상 모든 샤먼이 기원했다는, 신령하기로 유명한 바위산이다. 부랴트어로 바이칼은 '신의 바다'라는 뜻이다.

그러니 이 신의 바다 '바이칼의 배꼽'이라는 알혼(Ольхон)섬은 신의 배꼽일 테고 이 섬의 정기가 뭉쳐진 부르칸 바위야말로 '신의 바위'라 불리어 마땅하리라.

바이칼호의 부르칸 바위

일행 중의 몇 분은 아예 서울에서부터 유관(儒冠)과 제수를 준비해 와서 조상신에게 고유문(告由文)을 읽고 향을 피워 제사를 지내듯 절을 올리고 서울 물과 바이칼 물의 분수 의식(合水?式)을 행하기도 했다.

하기야 여기 와서 우리가 모두 느끼는 편안함이란 아마도 저 물 위에 한가롭게 헤엄치는 청둥오리와 하늘을 나는 기러기들, 쇠 갈매기, 제비, 이런 것들만으로도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환경이다.

거기다가 여러 곳의 돌무더기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언덕과 바위에는 온통 울긋불긋 형형색색의 천 조각을 매어 달아 소원을 빌었으니 어디 우리 동네 뒷산 서낭당의 당산목을 보는 느낌이다.

바이칼호의 샤먼 바위(Shamanka Rock)

마치 이 물가에서 '만신' 김금화 할머니가 금방이라도 우리 마음을 씻어 줄 씻김굿을 한바탕 벌일 듯하다.

이 물은 정말로 맑다. 다이버들은 시계 40m는 확실히 보장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물에는 한 번 들어가 목욕할 때마다 3년씩 젊어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 말에도 나이 든 일행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기껏 바지를 걷고 발을 담그는 정도일 뿐이다.

당시 방문 일행 중 가장 젊은 나모 양이 슬그머니 언덕을 내려가더니 그대로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한동안 유유히 헤엄치고 뭍으로 올라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내려다보았지만 아무도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젊은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이제 그 친구는 당시 스물아홉 살에서 스물여섯 살로 젊어졌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물에 들어갈 때보다 나온 후가 더 예뻐졌다. 먼발치에서나마 물에서 나온 여성을 향해 사방에서 카메라 셔터의 찰칵거리는 소리만 한참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는 내게는 꼴깍꼴깍 침을 삼키는 소리처럼 들렸다.

바이칼호 수영 액티비티 홍보 사진

도대체 저렇게 맑고 넓은 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앉아 있노라니 세상만사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소한 시빗거리에 우리는 고민하고 울부짖고 싸우고 남을 해치는가.

얼마나 많은 사소한 이익에 우리는 목숨을 거는가. 얼마나 많은 사소한 손해에도 우리는 목을 매는가.

저 물은 그런 걸 다 잊으라고 말했다. 저 유유한 광대무변의 물을 보고 나서 그 사소한 시빗거리들을 또 생각한다면 그건 너무 집요하다. 한마디로 집착이다.

이 '바다'에서는 일몰을 봐야 한다. 북쪽 나라에서는 해가 지려면 오래 기다려야 했다.

바이칼호의 일몰

어둑어둑해지는가가 싶어도 정작 해가 지는 걸 보려면 오래오래 기다려야 했다. 하늘 전체가 시뻘게지면서 그 붉은 하늘이 '바다'에 옮겨붙은 불길처럼 널리 널리 퍼졌다. 그러고는 역광으로 검은 산의 실루엣이 붉은 배경 앞에 우뚝 섰다. 일출도 봐야 했다. 찬란한 일출이었다.

해를 봤으면 달과 별도 봐야 했다. 도무지 주변에 빛이라곤 없으니 별빛은 더 밝을 수밖에 없다.

보이는 게 검푸른 물밖에 없으니 눈곱만한 불빛도 시야에 안 들어온다. 여기선 시간이 여기 앉은 이대로 멎는 듯하다.

나 역시 나옹선사라도 된 듯하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날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샤먼 바위를 떠나 우리는 '우아직'(UAZ)이라는 우직스럽게 생긴 차에 분승했다. 열 명쯤 타는 봉고차 모양의 구소련 군용차다. 바퀴가 크고 그 위에 차체가 높이 올라앉아 좀 엉뚱해 보였다.

그러나 여기처럼 험한 길에서는 위력이 있다. 옛날에 여기는 말을 타고서야 움직일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개활지이자 비옥한 목초지였다. 말을 타는 유목민들만이 여기서 살 수 있었다.

바이칼호의 우아직

그리고 다음에는 역시 밀을 타는 칭기즈칸 군대의 기병들만이 그 유목민들을 내쫓을 수 있었다. 칭기즈칸, 아니, 어린 테무친이 태어난 곳이 또 다른 곳에 있는 부르칸 마을이라고 했는데, 그가 죽어서 묻힌 곳도 이곳 부르칸 바위 근처라는 설이 있다.

또한 테무친을 낳은 어머니의 친정 마을이라고도 한다. 이곳이 몽골제국 절정기의 강역에 속한 땅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아무도 밝혀내지 못한 역사 속의 미스터리이지만 세계사에서 가장 튀는 영웅의 매장지조차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시간의 무상함이자 인간의 무상함이다. 우직스러운 우아직의 러시아인 운전기사는 앞차의 뒤에서 뿜어 나오는 흙먼지를 조금도 개의치 않고 그냥 바짝 따라갔다.

먼지 때문에 앞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 한 시간 동안의 알혼섬 북쪽 지대 여행은 바이칼의 풍광을 만끽한 좋은 여행이었다.

김원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독립기념관·코엑스·태백산맥기념관·국립국악당·통일연수원·남양주종합촬영소 등 설계. ▲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삼성문화재단 이사, 서울환경영화제 조직위원장 등 역임. ▲ 한국인권재단 후원회장 역임. ▲ 서울생태문화포럼 공동대표.

* 자세한 내용은 김원 건축가의 저서 '행복을 그리는 건축가', '꿈을 그리는 건축가', '못다 그린 건축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