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문화의 상징' 번역 30년…"가보지 않은 길, 다음 세대에 전해야"
번역률 아직 37.4%…"고전 번역 연구 인력 양성·예산 확보 필요"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얼마 뒤 갑자기 일어나 단을 내려가 오줌을 누었으므로 상 또한 일어나 단을 내려가 진 밖의 동쪽 모퉁이로 나가서 휴식하였다."
1637년 음력 1월 30일 삼전도.
남한산성에서 고립무원 처지가 된 인조(재위 1623∼1649)는 청나라 태종 앞에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닿도록 숙이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했다. 병자호란의 패배를 인정하는 항복의 예였다.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웠던 이날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인조가 진시(辰時·오전 7∼9시)에 성을 나간 순간부터 청 태종이 용변을 보는 일, 당시 사람들이 앉았던 자리까지 생생하다.
조선시대 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承政院)이 작성한 일기 기록을 통해서다.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승정원일기' 번역 사업이 30년 기점을 지난다. 1994년 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 시절부터 꾸준히 해온 역사의 '퍼즐' 맞추기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승정원일기 번역 평가와 자문 업무를 하는 오재환 책임연구원은 최근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승정원일기 번역은 조간신문을 읽는 것"이라고 말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왕명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국정과 관련된 내용을 일기 형태로 기록한 책으로, 현재 3천243책이 남아있다.
인조 1년인 1623년 3월부터 1910년 8월까지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다.
조선왕조실록이 왕을 중심으로 편집한 기록이라면 승정원일기는 회의에서 오간 대화, 각 부서에서 왕에게 올린 문서, 개인이 쓴 상소 등 당대 일거수일투족을 담고 있다.
오 연구원은 "승정원일기의 핵심은 조선시대판 국무회의 기록"이라며 "500년 전 사람들이 어떻게 의사 결정을 했고, 어떤 법·제도·관례로 일했는지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번역을 시작한 지 어느새 30년, 그러나 갈 길은 멀다.
2004년 고종(재위 1863∼1907) 대의 승정원일기가 210책으로 완간됐고, 2010년에는 인조 승정원일기가 76책으로 마무리됐으나 현재까지 번역률은 37.4% 수준이다.
현재는 50년 넘게 재위한 영조(재위 1724∼1776) 대 기록을 옮기고 있다.
지난해까지 영조 시기 807책 가운데 번역된 자료는 604책, 아직 200여 책이 남아있다. 연간 60∼61책을 번역한다고 치면 2048∼2049년에야 번역 작업이 끝날 전망이다.
강성득 승정원일기번역팀장은 "승정원일기는 단일 서종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서종"이라며 "조선왕조실록의 4배, 명나라 실록의 15배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최근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번역 기능이 활성화됐지만, 승정원일기와 같은 고전 문헌을 번역하는 데는 한계점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게 학계 중론이다.
AI 번역 과정을 검토하기도 했던 강 팀장은 "AI 번역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라며 "정치적 상황이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해야 하는 부분은 번역자의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승정원일기 기록에는 '철무'(鐵鍪)라는 한자가 나온다. 직역하면 쇠로 만든 투구라는 뜻이지만 염치를 돌보지 않아 뻔뻔하다는 뜻에서 '철면피'와 같은 말로 풀이된다.
정치적 사안을 포함한 상소, 국왕과 신하가 나누는 대화 등도 AI 번역이 쉽지 않은 부분이다.
오 연구원은 "여러 사전을 찾아도 도움받을 수 없는 어휘, 글자 뜻도 많다"며 "단어 뜻을 알기 위해 자료를 찾다 보면 1줄 번역하는데 1∼2시간 걸리는 일도 예사"라고 말했다.
힘든 작업이지만 승정원일기 번역이 이뤄낸 성과는 분명하다고 이들은 입을 모았다.
강 팀장은 "지난 30년간 한학을 전공한 선생님들이 뒤로 물러나고 이를 이어받아 번역하는 세대가 성장했다"며 "승정원일기 번역은 고전 번역 역사의 중심"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표준 번역 사례집 정리, 번역 과정에서 연구가 필요한 어휘 수집, (번역) 팀제 운용 등은 중요한 성과"라며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이런 사례는 드물다"고 덧붙였다.
승정원일기 번역 작업은 내년에도 쉼 없이 이어간다.
고전번역원 승정원일기번역팀과 외부 번역위원이 함께 61책을 우리말로 옮길 예정이다. 전년과 마찬가지로 약 24억4천만원의 예산이 투입될 예정이나 여러모로 빠듯한 상황이다.
두 사람은 고전 번역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커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옛것을 이해하고 번역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만큼, 연구 인력을 꾸준히 양성하고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예산도 꾸준히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오 연구원은 "올해 번역 작업에는 70여 명이 참여했지만 향후 10년 안에 약 30% 정도가 정년 문제 등으로 빠질 예정"이라며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고전 번역자에 대한 처우는 수년째 제자리"라면서 "기록 유산의 가치를 제대로 지키고 이어가기 위해서는 처우 개선이 필수"라고 힘줘 말했다.
강 팀장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고전 번역은 우리가 해야 할 '책무'라고 언급하면서 승정원일기를 대중에게 더 많이 알리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승정원일기 번역은 '가보지 않은 길'입니다. 방대한 양의 사료를 번역하는 것 자체가 큰일이지요. 그 과정에서 축적한 경험을 잘 정리해 다음 세대에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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