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증시전망] 'M&A 시장의 메기' 사모펀드發 지각변동 커진다

연합뉴스 2024-12-31 08:00:37

대기업 침체 속 기업구조 개편 견인…'대주주 견제' 등 거버넌스 새바람

영향력 갈수록 확대될 듯…"소통 통한 이미지 개선·새 위상 정립 필요"

기업 구조 개편(일러스트)

(서울=연합뉴스) 김태균 기자 = 2024년은 사모펀드(PEF)를 대중에게 깊이 각인시킨 한해였다.

경기 악화로 대기업 주도의 인수합병(M&A)이 줄어든 상황에서 PEF가 기업 재편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SK스페셜티, 롯데렌터카, 한양증권 등 굵직한 M&A 딜을 성사시키며 자본시장을 넘어 재계에서도 존재감이 대폭 커졌다.

새해에는 PEF의 책임도 그만큼 커질 전망이다. PEF가 기업의 영속적 가치를 무시한 채 수익만을 앞세운다는 비판이 계속되고 이해당사자와의 갈등이 잦아짐에 따라 이미지 쇄신이란 과제를 안게 됐다.

PEF는 투자자로부터 유치한 자금으로 기업을 인수·매각하는 펀드다. 공모 절차 없이 소수 투자자에게서만 선별적으로 투자를 받아 '사모(私募)'라는 명칭이 붙었다.

PEF는 기업을 샀다가 차익을 챙기고 되판다는 특성 때문에 일각에서 '돈만 좇는 중개인' 등 비판을 듣지만, 우리 경제에서 선(善)기능이 작지 않다. M&A 시장을 활성화하고 인수한 회사를 효율화해 업계의 혁신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과거 PEF는 몇몇 주요 M&A 거래 때 조력자로 등장하던 '은둔의 플레이어'였지만, 이젠 고려아연 등 대기업 경영권의 확보까지 추진하며 재벌 오너 가문을 견제할 'M&A 실력자'로서 입지를 다졌다.

기업 지배주주의 독주에 적극적으로 맞서면서, 우리 증시의 핵심 과제인 거버넌스(지배구조) 개선에 긍정적 자극을 준다는 평도 받는다.

◇ 햄버거 프랜차이즈부터 항공사까지

PEF는 이미 우리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국민 대부분이 아는 기업 중 상당수가 PEF 소유다. 오스템임플란트(MBK), 버거킹(어피니티), 하나투어(IMM PE), 이스타항공(VIG파트너스) 등이 대표적 예다.

M&A 시장에서 PEF는 중요한 자금 공급원이다.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의 집계에 따르면 국내 대기업 361곳을 대상으로 최근 3년간 M&A 현황을 조사한 결과, 올해 M&A 투자 규모는 총 8조5천808억원으로 전년보다 39.3% 감소했다.

글로벌 시장 변동과 내수 부진 탓에 많은 대기업이 M&A에 '실탄' 공급을 줄인 탓이다. PEF는 이 빈틈을 메워 거래를 진행시킨다.

여의도 태영건설 본사 모습

SK그룹은 올해 PEF를 가장 활발히 활용한 대기업이다. SK 측은 6월 SK렌터카를 홍콩계 PEF 어피니티에쿼티파트너스에 매각한 데 이어 11월에는 이차전지 소재 계열사 SK넥실리스의 박막사업 부문을 국내 PEF 어펄마캐피탈에 팔았다.

12월에는 특수 가스 업체인 SK스페셜티와 반도체 소재 기업 SK엔펄스의 사업부를 토종 PEF 한앤컴퍼니(한앤코)에 매각키로 했다.

자금난을 겪던 태영그룹은 지난 8월 국내 1위의 폐기물 처리업체 에코비트를 사모펀드 연합체인 'IMM컨소시엄'에 2조700억원에 넘겼다.

올해 금융위원회 집계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국내 PEF 수는 1천80개, 설정액은 133조9천억원 규모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재계 해묵은 숙제 '거버넌스 개선' 촉매 역할

국내 최대 PEF 운용사인 MBK파트너스는 영풍[000670]과 함께 지난 9월 유명 비철제련업체 고려아연[010130]의 지배권을 확보하겠다고 발표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고려아연 실제 오너가(家)인 최씨 일가의 최윤범 회장을 경영 일선에서 퇴진시키겠다는 취지로, 재계 체계를 정면으로 뒤집는 행보였다. 최 회장 측은 '적대적 M&A'라며 즉각 반발했다.

고려아연 본사 입구

MBK·영풍 연합과 최 회장 측은 주식 공개매수 등 치열한 지분 확보 경쟁 끝에 내년 1월23일 임시주주총회에서 이사회 제도 개편 등 주요 안건을 두고 표 대결을 벌인다.

양측은 경영권 분쟁 중 기업가치 및 주주권익 제고에 대해 여론전을 벌이며 주주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사회의 독립성은 어떻게 지키나' '좋은 거버넌스의 실익은 무엇인가' '집중투표제는 어떻게 적용해야 하나" 등에 대한 공박이 잇따랐다.

분쟁에서 어느 쪽이 이길지 아직 불투명하지만, 고려아연 사태는 국내 거버넌스 논의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공론장을 제공할 것으로 많은 학계 전문가는 전망한다.

거버넌스 연구 전문가인 이창민 한양대 교수(경제개혁연대 부소장)는 "이번 분쟁은 한국 경영학 교과서에 실릴 만한 이례적 사건"이라며 "경영권은 보호가 아닌 경쟁의 대상으로 회사 운영을 더 잘하겠다는 사람과 경합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한앤코의 남양유업[003920] 인수는 '오너 독단 리스크'를 덜어낸 사례라는 평이 업계 일각에서 나온다. 남양유업 창업주인 홍원식 전 회장은 대리점 갑질, 요구르트 허위 홍보 등으로 물의를 일으켜 기업 이미지가 추락하자 2021년 한앤코에 회사를 처분했다.

홍 전 회장은 매각 이후에도 여러 차례 한앤코와 법적 분쟁을 계속했고, 과거 남양유업에서 200억원대 비리를 저지른 혐의로 최근 검찰에 구속기소 됐다.

한앤코 관리 아래 남양유업은 올해 3분기에 2019년 2분기 이후 처음으로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대리점과의 상생 노력을 인정받아 작년과 올해 연속으로 공정거래위원회 '대리점 동행기업'에 선정됐다.

◇ 새해도 PEF 역할 커질 듯…합리적 시장 참여자로 위상 정립

PEF는 인수한 기업을 매각해 얻는 투자 차익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기업 사냥꾼'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엑시트(투자금 회수)만 노려 M&A를 악용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는다.

'기업 사냥꾼' 일러스트

특히 올해 MBK·고려아연 사례처럼 PEF가 대기업 거버넌스 변화를 이끄는 역할을 하자, 재계에서는 'PEF발 M&A 격변'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계심이 커졌다.

많은 대기업이 3∼4대째로 오너가 승계가 거듭되면서 지배 지분이 대폭 희석됐고, 이 때문에 주식 매입을 통한 인수에 취약해져 M&A 시도가 남발될 공산도 있다는 것이다.

PEF가 주주권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기업 경영에 관여하는 '행동주의' 색채를 띠면서 정치권, 시민사회, 소액주주 등의 견제를 받을 리스크도 커진다.

MBK가 핵심 소재 공급망을 책임지는 고려아연을 중국에 매각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에 휘말려 올해 국정감사에서 질타를 듣고, DB하이텍 소수주주들이 토종 행동주의 펀드인 KCGI가 단기 차익만 챙기고 회사에 손해를 입혔다며 반발한 사례 등이 대표적 예다.

이 때문에 내년엔 PEF들이 복합적 외부 갈등이나 평판 문제를 관리할 부담감이 더 무거워질 것으로 업계 관계자들은 내다본다.

PEF가 상생 경영을 강조해도 내부 지지를 못 얻는 것도 난관이다. 체질 개선을 위해 사업 부문을 정리하면서 반발이 일고 '먹튀 자본' 인식 탓에 노조 등과 다툼이 생기는 경우가 적잖다.

MBK가 2015년 인수한 대형마트 홈플러스는 노조와 PEF 사이 갈등의 골이 장기간 깊어진 상태다.

홈플러스 노조는 MBK가 익스프레스(슈퍼마켓) 부문만 따로 조기 처분하려고 하고, 인력 감축으로 큰 고통을 줬다며 분리 매각 등 MBK 결정을 전면 반대한다.

올해 12월 어피니티로의 매각이 확정된 롯데렌탈[089860]도 M&A 계약 발표 수일 뒤 소속 노조원들이 '고용 불안이 우려된다'며 반대 집회를 열었다.

전문가들은 PEF의 커진 존재감만큼 새 위상 정립이 필요하다고 당부한다.

폐쇄적 운영 문화 탓에 대외 발언을 피한 데다 M&A로 대중이 상상하기 어려운 거금을 번다는 반감까지 받는 만큼, 합리적 시장참여자로서의 대외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세대 경영대의 신진영 교수(전 자본시장연구원 원장)는 "PEF는 경제 논리를 냉정히 따르는 조직이지만, 경제에 미치는 순기능이 크다. '어차피 욕을 먹는다'는 인식 탓에 노출을 꺼리던 종전 태도를 바꿔 이해당사자를 적극적으로 설득하는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ta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