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말저런글] 대궁밥

연합뉴스 2024-12-31 06:00:13

책에서 행남자기 밥그릇 크기 변천사를 봤습니다. 『우리 음식의 언어』라는 서적입니다. 이에 따르면 1942년 용량은 550㏄였습니다. 그때를 정점으로 1952년 530㏄, 1965년 500㏄로 내려갑니다. 이후 500㏄대 시대는 저물고 1975년 450㏄, 1992년 400㏄로 작아지더니 2006년 350㏄, 2013년 260㏄로 더 쪼그라듭니다. 골프채 드라이버 대가리가 커지는 동안 밥그릇 크기는 작아져만 갔습니다. 밥심으로만 살던 시절은 저 옛날이 됐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밥'은 곧 '하늘'입니다. 그것만으로 살긴 어렵지만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밥이 주식인 우리네 삶에 알게 모르게 스민 태도입니다. 옛 어른들의 흔한 인사가 '밥 먹었니'였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한 형사가 연쇄살인 용의자를 붙들고 하는 말이 '밥은 먹고 다니냐'였으니 말 다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조선 시대 밥그릇

어휘 세계에서도 밥은 하늘과 같습니다. 『어휘 늘리는 법』이 인용한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에 쓰인 몇몇 단어만 봐도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기승밥]이 있습니다. 모를 내거나 김을 맬 때 논둑에서 먹는 밥입니다. 메벼를 찧으면 나오는 쌀이 멥쌀 아니겠습니까. 멥쌀은 입쌀이라고도 합니다. [입쌀밥]은 [찹쌀밥]보다 찰지지 않습니다. 찰지지 않다고 맛이 없겠습니까. 갓 지어 겉절이를 걸쳐 먹으면 꿀맛입니다. 농사꾼이나 일꾼들이 끼니 외에 참참이 먹는 밥은 [사잇밥], 즉 새참입니다. [첫국밥]은 아이를 낳은 뒤에 산모가 처음으로 먹는 국과 밥을 일컫습니다. [턱찌끼]는 먹고 남은 밥입니다. 팥을 달인 물에 흰쌀을 안쳐 지은 밥 혹은 찬밥에 물을 조금 치고 다시 무르게 끓인 밥은 [중둥밥]이라고 썼습니다. 손대지 않은 깨끗한 밥 혹은 솥에서 처음으로 푼 밥은 [숫밥]이고요.

그 많은 '밥'말이 있지만 대궁은 남다른 느낌을 줍니다. 먹다가 그릇에 남긴 밥으로, 대궁밥이라고도 합니다. 밥맛이 없어 남긴 것이라면 그저 남긴 밥으로 부릅시다. 다른 사람이 안심하고 먹으라고 일부러 배려하여 남긴 밥이 대궁이어야 좋을 것 같습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가짜 광해는 수라간에서 가져온 음식을 원 없이 싹 다 비웁니다. 그러다 "전하께서 남기신 어식으로 수라간 궁녀들이 요기를 하옵니다"라는 한 신하의 귀띔에 각성합니다. 다음날 상을 받자 잣 다섯 개로 수놓은 팥죽만 먹고 모든 산해진미를 물립니다. 곁에 있던 신하는 배시시 웃습니다. 수라간에서는 대궁 음식을 나눠 먹으며 나인들이 파안대소합니다. 감나무에서 감을 딸 때조차 까치 먹을 것은 남겨둬야 합니다. [까치밥]은 까치들을 생각하는 우리의 [대궁]입니다. 가짜 광해는 말합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기자, uni@yna.co.kr)

※ 이 글은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1. 박일환, 『어휘 늘리는 법』, 유유, 2018

2. 한성우, 『우리 음식의 언어』, 어크로스, 2018

3. 추창민, ≪광해, 왕이 된 남자≫, 2012

4.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온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