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주문화] (100)"척박한 환경 딛고 살아온 삶 모습 그대로가 문화"(끝)

연합뉴스 2024-12-29 10:00:13

제주 문화·학술·예술계 박찬식·김순자·김동현 인터뷰

"관광객 시선 대신 사람과 소통하며 제주 이해해보길"

박찬식·김순자·김동현 인터뷰

[※ 편집자 주 = 제주에는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생성된 독특한 문화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세대가 바뀌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문화와 함께 제주의 정체성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고 불안합니다. 역사 속에서 후진적이고 변방의 문화에 불과하다며 천대받았던 제주문화.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속에서 피폐해진 정신을 치유하고 환경과 더불어 공존하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제주문화가 재조명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라는 우리말은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란 뜻 외에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 또는 '하다가 그친 것을 계속해서'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2021년 1월 말부터 4년 동안 100회에 걸친 기획 연재를 통해 제주문화가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계승해 나갈 방법을 고민해봤습니다. 이번 회를 끝으로 '다시! 제주문화'의 연재를 마칩니다.]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남국의 정취', '남국의 민속'….

사람들은 과거 제주를 남쪽에 있는 나라란 뜻으로 '남국'(南國)이라 부르곤 했다.

알아듣기 힘든 사투리로 인해 국내 드라마에 한글 자막이 등장하기도 하는 등 독특한 민속문화와 이국적인 자연환경 때문이다.

대중가요 노랫말에도 제주에 대한 이미지는 남다르다.

과거 유배지로 악명이 높았던 제주는 현대 들어 '신혼부부 밀려와 똑같은 사진'을 찍는 곳이었다가 이제는 '모든 것 훌훌 버리고' 훌쩍 떠나 '푸른 밤 그 별 아래' 휴식을 취하는 대표 관광지로 변했다.

다양한 이미지가 상존하는 제주.

우리는 제주의 자연, 문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제주 최초의 공립박물관인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의 박찬식 관장, 제주인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제주학 연구에 매진하는 제주학연구센터의 김순자 센터장, 제주 전통문화와 역사정신을 문화예술의 언어로 표현하는 제주민예총의 김동현 이사장을 지난 19일 만났다.

한라산 백록담 '만설'

◇ "사람 만나 소통하면 제주 문화 더 잘 이해"

박찬식 관장과 김순자 센터장, 김동현 이사장은 제주의 문화를 논할 때 한결같이 '사람'을 강조했다.

역사학자인 박 관장은 "복잡하게 얘기할 필요 없이 제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제주민속문화"라고 말했다.

그는 "제주 역사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눠본다면, (제주민속문화는) 엘리트 지배층이 존재하고 교역이 발달했던 탐라국 시대의 문화라기보다는 탐라 이후 고려·조선시대 당시 변방으로 전락한 '섬' 사람들의 문화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 관장은 "조선시대 출륙금지령으로 갇혀 살던 제주 사람들의 삶, 유배의 섬, 척박한 자연환경과 폐쇄된 공간을 딛고 어렵사리 살아왔던 제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독특한 제주민속문화로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은 인조 7년인 1629년부터 순조 25년인 1825년까지 약 200년간 제주에 출륙금지령을 내렸다. 국법으로 관청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다른 지역으로 나갈 수 없도록 막아놓은 탓에 제주 사람들은 섬 안에 갇혀 폐쇄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언어학자인 김순자 센터장은 "타지역과의 접촉이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라며 제주 고유의 언어 제주어와 해녀문화, 돌문화, 1만8천 신들의 이야기(신화)가 입에서 입으로 구전돼 전해온 '본풀이' 등을 예로 들었다.

인터뷰 하는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

김 센터장은 "에스키모어에는 눈(雪)을 가리키는 단어가 수십 가지나 되듯 제주 해녀들은 '구젱기'(소라를 뜻하는 제주어)만 하더라도 크기·나이·부위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달리 표현했다"며 "해녀와 돌을 쌓는 돌챙이(석공), 심방(무당) 등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다양한 어휘와 문화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학평론가인 김동현 이사장 역시 같은 목소리를 냈다.

김 이사장은 "문화라는 것은 인문지리적 환경과 시간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 하는데 결국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제주도'라고 하면 관광객들이 이국적인 풍경, 자연환경을 얘기하곤 하는데 '문화'는 지역 사람들이 오랜 시간 축적해 온 무형의 자산인 만큼 제주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우선 '사람'과 만나 소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관광객의 시선으로 제주를 보지 말고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제주의 시간을 이해해야 한다"며 "그러면 제주의 문화, 제주의 속살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 "열등감 벗어던지고 전통에 대한 자긍심 가져야"

200년에 걸친 폐쇄된 삶과 격차, 서울·수도권 중심의 사회환경 속에 제주는 지금껏 '변방의 문화'라는 열등감에 빠져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과 김순자 제주학연구센터장,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은 제주문화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인터뷰 하는 김순자 제주학센터장

박찬식 관장은 "해석의 문제다. 과거에는 (설화에 나타난 제주 사람들의 현실 인식을 풀이하는 과정에서) 제주를 진짜 변방으로 인정해버리는 듯한 인식이 있었지만, 제주 민란인 이재수의 난을 다룬 현기영 선생의 소설 '변방의 우짖는 새'는 변방에서의 저항정신을 강조한 면을 엿볼 수 있다"며 "이제 우리 시대는 민주화 이후 지방자치시대를 이뤄냈고 지역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시대 분위기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박 관장은 "한강의 소설에서 고통과 비극 속에 살던 사람들의 모습이 오히려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듯이 출륙금지령 이후 어려움을 뚫고 살아간 제주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며 "제주의 문화 자원도 끊임없이 탐구해야할 가치가 있고 충분하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김동현 이사장은 같은 맥락 속에 제주 안에 내재한 열등감을 벗어던질 것을 주문했다.

그는 "제주 이주열풍과 관광 붐이 일었던 시기를 돌아보면, 제주는 당시 외부의 시각을 통해 새롭게 발견됐다. 어찌 보면 제주에 사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고, 너무나 익숙한 것이기에 제주의 가치를 제대로 못 알아봤던 것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제주 사람들) 안에 가진 일종의 문화적 열등감을 극복해야 한다"며 "지역의 문화가 살아야 한국의 문화가 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뷰 하는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

김 이사장은 "광범위하게 이뤄지는 개발로 인해 제주의 전통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제주라는 지역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 다양성을 계승하고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문화예술의 힘을 통해 대중에게 우리 전통에 대한 자긍심, 고유의 정체성을 폭넓게 느끼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문화를 총망라한 아카이브 설립의 필요성을 제안하기도 했다.

김순자 센터장은 "제주가 다른 지역과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가졌다고 하면서도 관련 자료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느냐 하는 데는 의구심이 든다"며 "많은 자료가 현재 도내 각 도서관 한편에 '향토자료실'이라는 이름으로 흩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대여도 안 되는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김 센터장은 "제주 관련 양질의 도서 자료뿐만 아니라 구술 자료, 영상, 사진, 유물 등을 한데 모아 '제주학 자료관' 등의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단순히 제주 로케이션 영화, 드라마에 대한 예산 지원만 하는 것이 아닌 제주 문화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지원과 협업이 이뤄져야 한다"며 "잘못된 내용이 나간 뒤 이를 바로잡으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찬식 관장은 "각 박물관, 도서관이 가진 자료를 디지털화해 디지털 아카이브 형식으로 공유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역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모든 기관과 전문가가 함께 연대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bjc@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