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출범 30년…'美우선주의' 트럼프 귀환에 자유무역 체제 중대도전

연합뉴스 2024-12-29 08:00:11

30년간 무역협상·분쟁해결 중추 역할…트럼프 1기 때부터 상소기구 마비

트럼프, 집권 2기 앞두고 무역전쟁 예고…보호주의 대두 속 교역 위축 우려

정부 "양자·다자적 접근 등 모든 방법·가능성 열어놓고 국익 극대화 모색"

세계무역기구(WTO) 청사

(제네바·서울=연합뉴스) 안희 특파원 김동규 기자 = 자유무역과 다자주의를 표방하는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한 지 30년이 되는 내년에는 글로벌 무역 체제에 짙은 먹구름이 낄 것으로 전망된다.

코로나19 대유행과 우크라이나·중동 전쟁의 여파로 위축됐던 세계 교역이 회복 기미를 보이는 시기에 집권 1기 당시 강력한 보호주의 정책으로 글로벌 무역 질서를 흔들었던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중대 변수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무역 패권을 다투는 중국의 강경 대응이 유력시되는 상황에서 WTO 체제는 또 한 번 약육강식의 무역전쟁과 맞닥뜨릴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지난 30년간 WTO 체제에 힘입어 놀랄만한 성장을 이뤄내며 'WTO 모범생'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트럼프 당선인의 재집권 등 글로벌 환경변화에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 세계무역 성장 견인한 WTO 30년…분쟁해결 기능 마비 등 도전 직면

WTO는 다자무역체제의 근간으로 범세계적 교역 확대와 무역규범 강화, 회원국간 무역분쟁 해결을 목표로 하는 글로벌 교역 핵심 기구다.

국제 무역질서를 세우기 위해 1947년 마련된 관세 무역 일반협정(GATT) 체제를 대체해 1995년 1월1일 공식 출범했다.

교역 개념을 상품에서 서비스, 지식재산권으로까지 확장한 점이 GATT 체제와 차별점이다. WTO는 다자주의 원칙에 따라 각국의 교역 중에 발생한 분쟁을 해결하는 틀을 크게 바꿨다는 평가도 받았다.

WTO는 회원국들이 따라야 할 무역 규범을 세우고 불공정한 관세나 보조금, 무역제한 조치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고, 세계 시장에서 상품과 서비스 교역이 꾸준히 증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개발도상국의 무역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온 점도 WTO가 책임 있는 글로벌 무역 기구로 평가받는 이유다.

그러나 다자 협상 관리에서 한계가 드러났다. 농업과 비농산물, 서비스, 지식재산권 등 다양한 분야의 무역 자유화를 목표로 추진했던 다자 협상인 '도하개발어젠다(DDA)'는 2001년 첫 논의를 개시한 이후 여태 타결되지 못했다.

회원국의 이해관계가 제각각인데 일괄타결 방식을 추구하다 보니 23년이 지나도록 대다수가 만족할 접점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경직성은 일부 회원국끼리 특정 현안에 대해 합의하는 복수국간 협정을 추진하는 흐름을 낳기도 했다.

WTO의 위상에 큰 타격을 준 건 2019년 상소기구 마비 사태다.

트럼프 집권 1기 당시 미국 행정부가 WTO의 분쟁 처리 절차를 담당하는 상소기구 위원 선임 승인을 거부하면서 상소기구 구성이 불가능해졌다. WTO가 접수한 무역분쟁이 하급심인 패널 절차를 거친 이후 상소심을 진행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사태의 책임을 지고 2020년 호베르투 아제베두 당시 WTO 사무총장은 중도 사퇴했지만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현 사무총장의 재임 기간에도 상소심 기능은 회복하지 못했다.

이 같은 사법 공백은 회원국들이 질서 있게 준수할 수 있는 정교한 입법을 통해 해결해야 하지만, WTO의 무역 규범은 곳곳에 빈틈을 남겨두고 있다.

이미 무역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전자상거래를 비롯해 각국 정부의 산업 보조금 문제를 다룰 규범 개정 문제 등이 과제로 남아 있다.

우크라이나 및 중동 전쟁 등에 따른 국제적 안보 정세와 각국의 무역정책이 동조화하면서 세계 무역이 블록화한 점도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을 표방해온 WTO로서는 도전적 환경이다.

◇ '재집권' 트럼프 관세폭탄 예고, 中 맞불 예상…WTO 체제 위기 맞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WTO에 위기를 안긴 상소기구 무력화는 트럼프 행정부와 떼놓을 수 없는 문제다. 집권 1기 트럼프 행정부는 강력한 미국 우선주의 무역 정책을 폈고, WTO에 대해선 반감을 감추지 않았다. 중국을 포함한 개도국의 이익을 과도하게 대변한다는 주장이다.

당시 미국은 WTO의 상소기구가 사법적 월권행위를 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분쟁 심사위원 선임을 거부했지만, 사실상 WTO의 정책이 미국에 불리하다는 불만에 기인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트럼프 집권 1기 미국의 무역 정책의 속성은 중국과의 패권 경쟁 속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2018년 3월 '중국의 경제침략을 겨냥한 대통령 각서'에 서명하고 통상 전쟁을 선포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은 중국 수입품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산업보조금 등 중국의 불공정 관행을 맹비난했다. 중국도 고율 관세로 맞불을 놓으면서 통상 분쟁은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집권 2기를 코앞에 둔 트럼프 당선인은 이 같은 무역 전쟁에 다시 불을 붙일 태세다.

이는 WTO 체제를 더욱 위태롭게 할 것으로 보인다.

대선 기간 모든 중국산 수입품에 최대 60%의 관세를 물리겠다고 공언해온 그는 내년 1월 20일 취임 당일 이런 추가 관세에 10% 관세를 더 부과하겠다고 최근 소셜미디어를 통해 밝혔다.

관세 강화 및 제조업 기반 강화 공약을 적극 옹호해온 금융자산가 하워드 러트닉을 상무장관으로, 집권 1기 대중국 고율 관세 부과 작업을 이끈 제이미슨 그리어를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로 각각 지명하며 중국과의 일전을 벼르는 모습이다.

중국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인다.

고율 관세로 맞불을 놓는 방법 외에도 미국 기업을 반독점법 위반 혐의 등을 적용해 조사하거나 자국산 제품에 의존적인 몇몇 전략 산업을 겨냥해 공급을 끊는 방법, 특정 산업 부문에 선별적 관세를 매기는 방안 등도 중국의 선택지에 들어 있다.

미국이 WTO와 소원해진 상황을 이용해 중국은 무역 동맹국을 확대하고 각종 국제 회의에서 미국의 보호주의에 대한 비판 여론을 주도하는 움직임을 보일 것으로도 관측된다.

미중 갈등

◇ 'WTO 모범생' 한국…보호주의에 양자·다자주의 대응 병행

WTO 출범과 함께 회원국으로 가입한 한국은 지난 30년 동안 WTO 다자통상체제 안에서 많은 혜택을 받으며 놀라울 만한 성장을 일궈냈다.

출범 직후부터 서비스 교역 성장, 정보통신(IT) 제품 수출 증가 등의 성과를 거뒀고, 분쟁해결절차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통상이익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1994년 960억달러 수준이던 한국의 수출 규모는 WTO 가입 첫해인 1995년 1천251억달러로 처음 1천억달러를 달성한 데 이어 2004년 2천억달러, 2006년 3천억달러, 2008년 4천억달러, 2011년 5천억달러를 차례로 돌파해 최근엔 연간 6천억달러 이상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의 수출은 6천311억달러로, 세계 6위 규모로 커졌다.

한국은 2000년대 초반 DDA 협상이 진전을 이루지 못하며 다자무역체제가 한계에 부딪히자 2003년 칠레와 첫 FTA 체결을 시작으로 동시다발적인 FTA 체결 전략을 펴며 '경제 영토'를 넓히는 전략을 폈다.

자타가 공인하는 'WTO 모범생' 한국은 WTO 체제를 통해 실익을 취하면서 조직 내에서 분쟁패널 의장 등 주요한 역할을 맡으며 국제적 위상도 높여왔다.

특히 2020년에는 유명희 당시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WTO 사무총장 선거에 출마해 결선까지 오르며 한국의 통상 저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국은 최근 다자주의를 기반으로 한 WTO 체제가 흔들리고 있지만, 자유무역 기조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고 보고 양자주의를 기반으로 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등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

통상 주무 부처인 산업부와 외교부를 중심으로 신흥국과 자원 부국을 대상으로 FTA를 넘어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 경제동반자협정(EPA), 무역투자촉진프레임워크(TIPF) 등 새로운 틀을 통한 경제 협력을 꾀하는 중이다.

미국 트럼프 2기 출범을 앞두고 보호주의 강화 흐름이 예상되는 가운데 이에 대비하면서도 여전히 WTO를 활용한 대응법도 함께 모색하고 있다.

◇ 보호주의 대두 속 글로벌 교역 위축 우려…우리의 대응은

글로벌 무역 환경에서 보호주의가 대두하는 현상은 비단 트럼프 행정부 때만 있었던 건 아니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역시 자국 친환경 산업에 보조금을 주는 보호주의 정책이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이런 비판에 앞장섰던 유럽연합(EU)도 사실상 IRA와 비슷한 취지로 역내 친환경 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탄소중립산업법(NZIA)을 올해 통과시켰다.

트럼프 당선인의 집권은 각국의 보호주의 무역 정책을 더욱 자극할 것이라는 우려를 낳는다. 글로벌 무역이 회복세를 보이려는 시기에 또다시 도전적 환경을 맞게 됐다는 평가다.

코로나19가 발발한 2020년 5.3% 마이너스 성장을 했던 글로벌 무역은 이후 회복세를 보여왔다.

2021년에는 9.7% 성장률을 보이기도 했던 세계 무역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에너지 가격 상승 등 인플레이션 및 각국의 금리 인상으로 2년여간 2∼3%대의 둔화한 성장률을 보였다.

올해에는 여행과 운송 등 서비스 무역이 빠른 회복세를 보인 데다 내년에는 각국의 금리 인하가 예상되는 등 무역 성장에 긍정적 요인도 있지만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집권을 기점으로 불확실성은 급격히 커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정부 관계자는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 특성상 핵심 교역국인 미국과 중국 등 주요국과 연관된 통상 이슈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자적 접근뿐 아니라 WTO를 통한 다자적 접근 등 모든 방법과 가능성을 열어놓고 국익을 극대화하는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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