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피해자·목격자 진술 간 모순 주목…객관적 증거도 부족
"인정해도 벌금형" 경찰 설득에 자백했지만 '신빙성 부족' 판단
(춘천=연합뉴스) 박영서 기자 =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는데 화장실 쪽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났어요. 옷을 입고 있던 사람이 A(52)씨가 맞는 것 같아요…'
2022년 9월 11일 저녁 강원 태백시 한 사우나 남자 화장실에 있던 B(69)씨는 누군가로부터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폭행을 막은 오른손의 힘줄이 파열되고 손가락이 변형되는 등 6주간 치료가 필요한 상처를 입었다.
그의 112 신고로 수사에 나선 경찰은 A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B씨가 112에 신고한 시각은 오후 9시 22분이었고, 사우나 입구 폐쇄회로TV(CCTV) 확인 결과 A씨가 사우나를 나선 시각은 9시 21분이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50대 정도의 찜질복이 아닌 사복 차림 남성이 나를 폭행한 뒤 나가버렸다"고 진술했고, 9시 17분 사우나에 입실한 목격자 C씨 역시 "화장실 쪽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났다"며 A씨가 범인이 맞는 듯하다고 했다.
이에 경찰은 A씨가 9시 20분께 범행을 저지르고 곧장 사우나 밖으로 나갔다고 봤다.
A씨는 첫 경찰조사에서는 혐의를 부인했으나 두 번째 조사에서는 '범행을 인정하더라도 구속되지 않고, 피해자와 합의하면 벌금형이 선고될 수 있다'며 솔직하게 말해달라는 경찰관의 설득에 "피해자를 때렸다"며 자백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당시 대구에 살았는데 용변 칸에서 뿜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를 보고 격분해 폭행했다"는 동기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수사기관은 A씨가 범인이라고 보고 재판에 넘겼다.
그러나 1심을 맡은 춘천지법 영월지원은 A씨의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 피해자 B씨의 진술과 목격자 C씨의 진술을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B씨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폭행당해 범인의 인상착의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데다 가해자가 실제로 사우나 밖으로 나가는 장면조차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범인이 사우나 내에 머물렀을 수도 있는데 A씨를 범인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봤다. 실제로 범행 이후 사우나 위층에 있는 찜질방에 대한 수색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또 B씨는 폭행당한 이후 탈의실로 나왔을 때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곧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던 중 피해자와 가해자를 모두 목격했다는 C씨의 진술과도 들어맞지 않았다.
재판부는 특히 C씨가 A씨를 범인으로 지목한 부분에 상당한 의구심을 품었다.
애초 범인의 인상착의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던 C씨가 경찰이 보내준 A씨 사진 1장을 보고 A씨의 사우나 입·퇴실 시각을 들은 뒤 범인으로 지목한 건 그 자체로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고 봤다.
A씨가 상당량의 피를 흘렸음에도 수사기관이 A씨의 옷에 대한 조사를 전혀 하지 않아 객관적인 증거자료가 부족한 점도 무죄 심증을 굳힌 이유 중 하나였다.
경찰 조사에서 A씨의 자백을 믿기도 어렵고, A씨가 털어놓은 범행 동기와 달리 B씨는 암 수술 이후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으며, 범죄 전력이 없는 A씨에게서 폭력 성향도 확인되지 않는 점까지 미루어보아 A씨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결국 1심은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판결에 불복한 검찰이 항소했으나 춘천지법 형사1부(심현근 부장판사)는 1심의 판단이 옳다고 보고 기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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