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한국 최동수 기자] 금융당국의 국정 과제이자 보험업계의 고민 중 하나였던 실손보험개혁이 12·3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으로 결국 무기한 연기됐다. 과잉 진료로 인한 적자가 이어지자 방지책, 상품 구조 차등화 등 다양한 방안이 이번 개혁안을 통해 제시됐지만 정국 불안과 의료계의 반발로 무산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개혁안마저 좌초될 가능성이 커지자 보험사들은 매년 증가하고 있는 실손보험 관련 적자로 인해 보험료 인상이 필연적이라고 항변하지만 소비자들은 실손보험이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덜어주는 '공익적' 상품인 만큼 더 이상의 인상은 과하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업계는 내년 실손보험료를 평균 7.5% 올리기로 하면서 소비자와 업계의 갈등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27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보건복지부와 금융위원회는 지난 19일에 예정됐던 실손보험개혁 관련 공청회를 취소했다. 이에 연내 발표할 예정이었던 실손보험 개혁안 발표 역시 무기한 연기됐다. 금융위 관계자는 "의료개혁특별위원회에 참여할 의사들이 비상계엄 당시 계엄사령부 포고령에 담긴 '전공의 처단' 문구에 반발하며 불참을 선언하면서 결국 개최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약 4000만명이 가입되어 있어 제2의 건강보험으로 불리는 실손보험은 질병·상해로 입원·통원해 치료를 받을 시 피보험자가 실제로 부담한 의료비를 보험사가 보상하는 보험 상품이다. 발생한 의료비 중 공적 건강보험 부담금과 약관에서 정한 자기부담금을 제외한 본인 부담금(건강보험 본인부담금·비급여 의료비)을 지불해 준다.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실손보험이지만 비급여 과잉 진료와 의료남용 문제로 보험금 지급 규모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보험사 실적을 악화시키는 주범으로 지목되어 왔다.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23년 실손의료보험 사업실적(잠정)'에 따르면 작년 실손보험의 보험 손익이 1조9738억원 적자로, 전년(1조5301억원) 대비 적자 규모가 4437억원 늘었다.
이에 정부는 실손보험 시장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과잉 진료 방지책 △보험 상품의 구조 차등화 △보험료 인상 규제 완화 등의 개혁안을 준비하고 보험업계, 금융당국, 의료계와 꾸준히 협의해 왔지만 탄핵 정국으로 접어들면서 결국 실손보험 개혁은 사실상 좌초될 위기에 빠졌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실손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국민들이 대다수인 만큼 관련 문제에 대한 조속한 협의가 필요하다"며 "하지만 정국이 안정화되지 않으면 문제 해결은 더욱 오래 걸릴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사진=연합뉴스.◇ 손해율 증가로 보험료 인상 불가피
실손보험개혁이 무기한 연기되자 가장 난감해진 건 보험사들이다. 과잉 진료와 비급여 항목 무분별 이용이 지속되자 손해율은 매년 증가했고 이로 인해 발생한 적자가 실적에 반영되면서 상품 판매 중단까지 고민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기 때문이다.
이에 금융당국에서는 보험사 손해율 부담을 덜기 위해 지난 2021년 7월 4세대 실손보험을 출시했으나 여전히 손해율은 상승 추세를 보였다. 지난해 기준 손해율 100%를 넘은 보험사는 △MG손보 △삼성화재 △KB손보 △메리츠화재 △DB손보 △한화생명 △동양생명 △농협손보 △DB생명 △현대해상 등 10곳이었다. 손해율이 가장 낮은 삼성생명도 90.9%에 달했다.
손해율이 높을수록 보험사가 부담하는 보험료가 더 많아지면서 실적 악화로 이어지고 결국 보험료가 인상되면서 소비자 부담은 커지고 있다. 실제 생명·손해보험협회에 따르면 내년도 실손의료보험의 전체 인상률 평균(보험료 기준 가중평균)이 약 7.5%로 산출됐다. 올해 보험료가 평균 1.5% 오른 것과 비교하면 인상 폭이 크게 확대된 것.
상품에 따라 1세대는 평균 2%, 2세대는 6%, 3세대는 20%, 4세대는 13% 인상된다. 이는 모든 보험사의 평균이다. 실제로는 갱신주기·종류·연령·성별 및 보험회사별 손해율 상황 등에 따라 개별 가입자마다 인상률이 달라진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손해가 매년 늘어나면서 보험료 인상은 보험사 입장에선 어쩔 수 없다"며 "상품의 구성을 다르게 하거나 혜택을 줄여 보험료를 낮출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또다시 소비자들의 불만이 나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 보험료 인상으로 선량한 소비자 피해받을 수도
보험사들은 손해율 상승으로 인한 보험료 인상이라고 항변하지만 소비자들은 정작 과잉 치료를 받지 않은 선량한 소비자가 피해를 입을 수 있다며 피보험자와 보험사 간의 신뢰도 깨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일각에서는 실손보험 상품 규모 축소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표했다.
이와 더불어 실손보험의 지속적인 보험료 인상이 저소득층의 보험 가입을 포기하게 만들고 의료비 격차를 확대해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실손보험료가 지속적으로 올라가면 보험사의 내부 사정을 알 수 없는 소비자는 보험사의 경영 전략에 불만을 품게 되고 보험사는 소비자의 의료 남용을 억제하려는 방어적 조치를 강화하면서 양측의 갈등이 더욱 심해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러한 우려에 대해 현재 실손보험을 판매하고 있는 보험사들은 당장 실손보험 상품 판매를 중단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보험사 관계자는 "실손보험 개별 손해율이 높다고 해서 판매를 중단한다면 고객 포트폴리오 구상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하지만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과 사회적 합의가 절실한 만큼 꼭 향후에도 관련 개혁안을 진행시켜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