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좌우 날개' 한덕수의 커밍아웃

연합뉴스 2024-12-26 00:00:13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한덕수(75) 대통령 권한대행은 관료사회에서 관운(官運)의 '끝판왕'으로 통한다. 좋게 말하는 이는 행정의 달인, 삐딱하게 보는 이는 처세의 달인이라고 한다. 뭐라고 해도 한 대행만큼 좌·우를 넘나들며 출세 가도를 달린 사람은 없다.

윤석열 당선인과 한덕수 총리 후보 지명자

▷ 김영삼 정부에서 특허청장, 통상산업부 차관 ▷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경제수석, 통상교섭본부장 ▷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조정실장, 경제부총리, 국무총리 ▷ 이명박 정부에서 주미대사 ▷ 박근혜 정부에서 무역협회장을 지냈다. 박근혜 정부 중반엔 총리 물망에 올라 백두진, 김종필, 고건을 제치고 '총리 3관왕'의 대기록을 남길 뻔했다.

화려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한 한 대행의 스펙을 들여다보면 문재인 정부에서 한 템포 쉰 게 눈에 띈다. 호남 출신을 각 부처 장관을 비롯해 군과 경찰, 국정원 요직에 꽂은 문재인 정부가 전주 태생인 한 총리에 대해서만 유독 인색했던 것이다. 진보정권에서 총리까지 오른 사람이 어떻게 보수정권으로 다시 갈아탈 수 있느냐는 배신감이 문 정부 저변에 깔려있었다.

한 대행이 윤석열 정부 초대 총리로 지명되자 야권 내 불만이 터져나왔다. "김영삼 정부 때까지 '서울 사람' 행세를 했다", "주미대사라는 핑계로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등 폭로성 발언이 이어졌다.

노무현 대통령과 국무회의에 나란히 입장하는 한덕수 총리

우여곡절 끝에 한 총리 인준안은 민주당의 협조로 국회를 통과했고, 용산 대통령실은 "호남 총리 카드가 주효했다"며 탄성을 터트렸다. 윤 대통령에게 '한덕수 카드'를 강력하게 건의했다는 한 여권 인사는 "민주당이 텃밭인 호남 정서를 의식해 한덕수 카드를 거부 못 할 거라 봤다"고 했다.

한 대행이 24일 내란·김건희 여사 특검법과 헌법재판관 임명에 대해 "국민 대다수가 납득해야 한다. 여야가 토론과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며 사실상 거부 의사를 밝혔다. 야당의 특별검사 추천을 문제삼는 것인데, 법조계에서도 궁색하다는 지적이 많다.

이명박 정부의 '내곡동 사저 특검',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개명 후 최서원) 특검', 문재인 정부의 '드루킹 특검'도 야당끼리 합의해 특검을 추천했기 때문이다. 한 대행이 임명을 주저하는 헌재 재판관 후보 3명의 경우 국회 선출 몫이라 행정부 임시 수반 격인 그가 임명을 거부하는 것도 상식적으로 비치지 않는 게 현실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인사하는 한덕수 무역협회장

관가에선 누구보다 정세판단에 능하다는 한 대행이 여론의 반발과 거대 야당의 탄핵 경고에 맞서 왜 이런 판단을 내렸느냐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윤 대통령이 탄핵의 늪에서 생환할 거라 보고 재기의 발판을 깔아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좌·우를 오간 자신의 정체성이 보수였음을 세상에 각인하려는 것인지 등 갖가지 시선이 나온다.

한 대행은 비상계엄 조치 전 언론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에 대해 "대인이시다. 제일 개혁적인 대통령이기도 하다"고 극찬했다. 한 대행의 가슴 속에 윤 대통령을 향한 무한한 존경심과 남다른 의리가 있다는 여당 사람들의 얘기가 빈말이 아닌 것 같다. 민주당이 한 대행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느낌이 든다.

jah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