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손의 쓸쓸하고 고요한 사찰을 마주한다. 유등보살은 머지않아 아파트 밀림 속에 우뚝 서 계시리라. 현재 절집 주변에 낡은 주택들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흰 장막으로 가려져 있다. 장막 위로 얼기설기 솟은 크레인은 언제라도 절집을 공중으로 들어올 듯한 자세이다. 하지만, 어디 그것이 생각처럼 쉬우랴. 절집에는 무심천에서 모셔 온 석불상군(보물 제985호)과 협시보살이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다. 특히, 인간의 힘으로는 옮기지 못하는 5.5 미터의 미륵보살과 거구의 석불이 여러 기다. 그나저나 무심천에 묻힌 석불상군을 어떻게 이곳으로 옮겼는지 궁금하다. 그 작업은 아마도 대장정의 길이었으리라.
용화사는 법주사의 말사로 청주의 젖줄인 무심천변에 자리한다. 무심천은 봄에 벚꽃놀이로, 가을에는 억새 군락지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인근에 여러 부처님이 계시고, 땅 위에는 기화요초(琪花瑤草)가 풍요로우니 바로, 이곳이 화엄의 세계가 아닌가 싶다. 또한, 사찰에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마음 수련이나 명상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제공되어 누구나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선가. 미륵불이 용화수(龍華樹) 아래 내려와 설법하며 중생을 제도하듯 평일에도 이곳 스님들은 용화세계를 펼치느라 분주하시다. 지인은 오후에 사찰에 들 때가 많은데, 저녁 범종을 치는 스님이 매번 다르단다. 대사찰보다 스님이 더 많다는 소리이다.
무심천 주변에는 여러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된다. 용화사는 고려 후기에 고찰인 사뇌사(思惱寺)로 밝혀진다. 사뇌사는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창건된 대찰로 일부 학계에서는 몽골 4차 침입 때 유물들이 매몰한 것으로 추정한다. 어디 그뿐이랴. 불교 탄압 및 폐사 시, 도심에는 21개의 사찰이 건재하였다고 하는데, 용화사도 사라지고 일어서기를 여러 차례 하였으리라. 일설에는 신라 화랑들의 심신 단련과 군사들의 충성을 맹세하는 도량으로 활용되다가, 이후 여러 차례 병화(兵火)로 법당은 소실되고, 미륵불은 대홍수로 무심천에 묻혔다는 설도 있다.
임금이 바뀌거나 사찰이 사라질 때는 석불을 땅속에 묻는단다. 석불이 그대로 묻힌 것만이 아닌 듯하다. 두 동강이 난 것도 있고, 두상이 사라진 것도 있단다. 석불은 낚시꾼의 의자 대용으로 공헌하시니 중생 제도를 다양하게 하신듯싶다. 정녕 석불은 무심천 주변을 떠날 수가 없던가. 아니면, 어지러운 세상을 두고 보다 못한 미륵불은 고종의 후궁인 엄비(嚴妃)의 꿈에 나타나 계시한 듯하다. 꿈속에 나타난 늪의 물을 퍼내니 그곳에 칠존 석불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러구러 석불군을 용화사에 안치하였단다. 특히, 고려시대 귀중한 석불로 알려진 석불상군은 조각의 우수성과 중요성을 인정받아 국가의 유형문화유산 보물로 지정된다.
용화사의 관전 요소는 바로 용화보전의 입상 석불이다. 법당 정면에 약사여래불, 미륵불, 석가모니불 세 분만 보고 돌아서면 미련이 남으리라. 마주해야 할 보물이 석불 뒷면에 있다. 유등보살은 석가모니불과 한 몸이다. 석가모니의 젊은 시절의 모습이라고 추정하는데, 석불에 조각한 큰 나한상은 매우 드문 예이다. 석가모니불이 앞면에 조각되고, 시간 흐른 후에 유등보살을 새긴 것 같다고 한다. 석수의 섬세한 손길을, 숨결을 따라가 본다. 광배의 새김은 없으나 두상 주변에 아우라가 비친다.
유등보살은 얇은 가사를 입은 스님의 형상이다. 석상의 얼굴은 민머리에 달덩이처럼 환한 미소를 짓는 듯한 형상이다. 목과 옷 주름의 새김이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럽다. 가슴으로 내려오니 두 손에 찻잔을 다소곳이 모은 모습이 보이리라. 조금 전에 차를 나눈 스님의 모습처럼 형형하다. 전설 속 부처가 아닌 용화사의 젊은 스님을 닮은 듯싶다. 그대여, 절집에서 청아한 목소리의 젊은 스님을 마주하면 알은척하길. 아마도 스님은 따스한 차 한 잔을 그대에게 달여주리라. 백설이 난분분한 날 차 맛은 더없이 향기로우리라.
◆이은희 주요 약력
△충북 청주 출생 △ '월간문학' 등단(2004) △동서커피문학상 대상, 구름카페문학상, 박종화문학상, 한국수필문학상 수상 외 다수 △수필집 '검댕이' '화화화' '불경스러운 언어' 외 8권 △계간 '에세이포레' 주간 △청주문화원 부원장 △충북문화재단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