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습집중' 헤즈볼라 근거지 다히예·고베이리, 처참한 폐허로 변해
"헤즈볼라 지지하지도 않는데…이스라엘에 대한 마음 속 저항 있어"
"매일 인사하던 이웃들이 죽어"…"뭘알고 싶어 왔나" 쏘아붙이기도
(베이루트=연합뉴스) 김동호 특파원 = 휴전 이틀째인 28일(현지시간) 낮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도심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시아파 이슬람교 묘지.
친이란 무장단체 헤즈볼라 전사자들의 묘비가 빽빽이 들어찬 40평 남짓의 공간 한 켠에서 검은색 히잡을 쓴 여성들의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에르디스 샬후브(48)씨의 장례식이 막 시작된 참이었다.
민간인이었던 그의 시신은 헤즈볼라를 상징하는 노란색 깃발로 덮여 있었다.
곁에 서서 휴지로 눈시울을 훔치던 사미르 슈르씨는 "죽은 사람은 내 부인의 여동생의 남편(동서)"이라며 "사흘 전 월요일 새벽 한시에 다히예에 있는 집에서 자다가 드론(무인기) 공격에 숨졌다"고 말했다.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휴전 합의 소식이 전해지기 불과 하루 전이다.
슈르씨는 "동서는 IT 업계에서 일하던 개발자로, 무장대원이 아니었다"며 "왜 죽어야만 했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지난 2개월간 이스라엘군의 폭격이 집중된 베이루트 남부 교외의 다히예와 고베이리 지역. 이곳은 시아파 무슬림이 모여사는 곳이자 헤즈볼라의 핵심 근거지다.
고가도로 옆 고베이리 주택가 곳곳에 폭삭 주저앉은 건물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버티고 서 있는 건물들도 지붕이 날아갔거나, 외벽이 부서졌거나, 창문이 박살 난 상태였다.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길모퉁이에서 한참 서성이던 함마드 유니스씨는 "여기가 내가 운영하던 약국"이라며 통유리창과 내부 선반이 전부 부서진 건물 1층을 한 켠을 가리켰다.
유니스씨에 따르면 지난 9월 헤즈볼라 수장이던 하산 나스랄라가 이스라엘군에 살해되고 며칠 뒤 오전 4시쯤 유니스씨 약국 바로 앞에 이스라엘군의 포탄이 떨어졌다.
표적이었던 창고 가건물 단지는 원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렸고, 폭발 때 발생한 충격파로 주변 건물 6개가 큰 피해를 봤다고 한다.
유니스씨의 '아마르 약국'도 영업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그는 "7년 전에 대학을 졸업하고 가진 돈을 모두 털어서 일군 것들을 한순간에 잃었다"라고 허탈하면서도 "아내와 아이가 살아있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유니스씨는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생각하면 내 처지를 더 불평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며 "나는 헤즈볼라를 지지하지도 않고 무기와 전쟁 다 반대하지만, 우리 마음 속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이 있다"라고 말했다.
다히예에서는 좀처럼 성한 건물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언덕을 따라 빽빽이 들어선 아파트 두 채당 한 채꼴로 미사일 등에 포격을 맞은 모습이었다.
냉장고, 소파, 자전거, 옷가지 등이 뒤섞인 콘크리트 파편 속에서 희뿌연 연기가 계속 피어올랐다.
오토바이를 탄 한 남성이 "2주 전에 폭격당한 곳인데, 지하에 전기 배선이 합선돼서 계속 불이 난다"고 설명해줬다.
이스라엘군은 휴전 발효 전날인 지난 26일 이 일대를 맹렬하게 타격했다. 전쟁 초반에는 헤즈볼라 주요 인사나 시설을 노린 정밀 타격 위주였지만, 이번에는 수시간 전 발령되곤 했던 민간인 대피 경보도 없었을 정도로 무차별적이었다고 한다.
골목 한켠에 플라스틱 의자를 놓고 모여앉아 있던 노인 중 한 명은 "매일 인사하던 이웃들이 죽었다"며 "뭘 알고 싶어서 왔나"라고 쏘아붙였다.
그는 "사진기를 들고 동네 안으로 더 들어가면 누군가 당신을 잡아갈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발걸음을 돌려 숙소로 걸어가던 기자를 누군가 불러세우더니 대뜸 "어디서 왔냐, 북한이냐 남한이냐"라고 물었다.
구멍가게 앞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던 현지 소방관들이었다. 전쟁통에는 쉬는 날도 없이 일했지만 이날 모처럼 비번이어서 한숨 돌리던 중이라고 했다.
가벼웠던 대화 분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겁게 가라앉았다.
타레크씨는 "시체를 수도 없이 봤다"며 "폭격당한 지역은 이스라엘군 드론이 계속 날아다니는 탓에 당장 접근할 수 없을 때가 많은데, 며칠 뒤에 찾아가면 지독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고 말했다.
타레크씨는 옆에 앉은 동료 무함마드씨와 함께 작년 2월 튀르키예의 지진 피해지역에 파견돼 구조활동을 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소방관들은 어디서든 보호받고 환영받으면서 일하지만 지금 레바논 상황은 전혀 다르다"며 "이스라엘군은 소방관이든, 의료진이든, 언론인이든 가리지 않고 공격한다"고 말했다. 전쟁 기간 레바논 소방·구조대원 200여명이 죽었다고 한다.
타레크씨는 "이스라엘은 도덕적이지 않은 전쟁을 벌였다"며 "왜 이 땅에 들어와 남의 것을 탐하나"라고 말했다.
d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