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강성곤의 아름다운 우리말…잘못 쓰고 있는 표현-②

연합뉴스 2024-11-28 21:00:21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 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강성곤 KBS 한국어진흥원 운영위원

◇ 세상 밖으로?

감옥에서 형기를 마치고 나와 자유를 얻은 시민, 혹은 오랜 병치레나 장애 문제, 자발적 은둔 등으로 바깥세상 경험을 못 하던 이가 비로소 태양과 구름과 비를 마주할 때, 흔히 '세상 밖으로 나오다/나온다/나왔다'라고 한다.

이 표현은 과거 어느 시점에 기자나 방송 작가가 쓴 비유적 표현이 퍼진 게 아닌가 짐작한다. 그러나 '세상'을 일그러진 대상으로 본 출발부터 잘못됐다.

'세상' 자체를 기본값으로 봐야 긍정적이고, 일반적 통념에도 맞는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삶을 누리고 법과 질서가 제대로 돌아가는 사회 시스템, 그런 세상.

이제 죄인도 장애인도 병자도 은둔자도 그 세상 '안으로' 들어가 살아야 할 것 아니겠는가?

'세상 밖으로 나간다'고?

그것은 '적응'이 아니고 '일탈'이다. 범법을 계획하거나, 공간의 범위를 넓히면 지구 또는 태양계를 떠나겠다는 얘기다. 그 뜻이 아니라면 '세상 속으로'로 바루어야 마땅하다.

◇ 옥석구분?

"주식 종목, 옥석구분이 힘들다."

"개봉하는 영화가 많아 옥석구분이 어렵다."

위와 같은 표현이 흔히 쓰이는 걸 보면, 많은 사람이 옥석(玉石)구분(區分)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옥석은 구분(區分)할 수 없다. '옥석구분'(玉石俱焚)은 전혀 다른 뜻이다.

이는 중국 고서 '서경'(書經)에 나오는 말로, 이때의 옥석구분은 옥(玉)과 돌(石)을 구분한다는 게 아니라, 옥이든 돌이든 모두(구, 俱), 불태운다(분, 焚)는 의미다.

곧, 착하고 옳은 사람이나 나쁘고 그릇된 사람이나 다 재앙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린다는 의미를 표현할 땐 '옥석을 구분하다'가 아니라 '옥석을 가린다'라고 하면 된다.

'주식 종목, 옥석구분이 힘들다 ( X )'

'주식 종목, 옥석을 가리기가 힘들다 (○)'

'개봉하는 영화가 많아 옥석구분이 어렵다 ( X )'

'개봉하는 영화가 많아 옥석을 가리기가 어렵다 (○)'

◇ 유명세

유명세는 '有名稅'다. '有名勢'가 아니다.

유명해서 생기는 기세가 아니라, 유명해서 치르는 불편, 부담 등을 세금(稅金)에 빗댄 것이다. 따라서 유명세 다음에 '타다', '얻다' 등은 올 수 없다. 유명세는 '치르는' 것이다.

'유명세를 얻다 ( X ) | 유명세를 타다 ( X )'

'유명세를 치르다 (○)'

◇ 일파만파를 낳다?

일파만파(一波萬波)는 하나의 물결이 연쇄적으로 많은 물결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잇따라 일어나는 사건의 비유로 많이 쓰인다. 말하자면 연결, 진행, 과정이다. 상태, 완료, 종결이 아니다.

'낳다'는 후자에 가까우므로 여기에선 어색하다. 물론 명사지만 부사어 형태로 이음, 연결, 확장의 분위기를 풍겨야 자연스럽다.

'일파만파(로) 번지다', '일파만파(로) 퍼지다' 혹은 '일파만파다'로 맺음말 형태로 쓰는 게 낫다.

'일파만파를 낳다 ( X )'

'일파만파(로) 번지다 | 일파만파(로) 퍼지다 | 일파만파다 (○)'

◇ 겹치는 말

'깊은 숙고(熟考)'는 겹치는 말이다. 숙(熟)이 '깊다'는 의미이므로 숙고는 곧 깊이 생각한다는 말이다. '깊은 생각'이면 족하다. 유사한 예를 몇 개 더 추리면 아래와 같다.

'약 ○○ 곳 정도 ⇒ 약 ○○ 곳, 또는 ○○ 정도'

'약'에 정도의 의미가 담겨 있다. 둘 중 하나는 빼야 한다.

'오래된 숙원 ⇒ 오래된 염원'

숙(宿)에 '오래되다'의 의미가 있다.

'검정색 ⇒ 검은색'

'검정' 자체가 검은 빛깔이다. 색은 군더더기다. 노랑, 파랑, 빨강도 마찬가지다.

'미리 예고 ⇒ 예고'

예(豫)가 '미리'의 뜻이다.

'아직 미정 ⇒ 미정'

미(未)가 '아직'의 뜻이다.

'여러 분들 ⇒ 여러분'

'여러'에 복수의 의미가 담겨 있어 '들'이 불필요하다.

'머리가 하얗게 세다 ⇒ 머리가 세다'

'세다'에 '하얗게 되다'의 의미가 이미 들어 있다.

이 밖에도 '아직 미지수', '근거 없는 낭설', '방학 기간 동안', '불조심 유의', '결실을 맺다', '격세지감을 느끼다', '수혜를 받다', '피해를 입다', '미리 예상하다', '갑자기 졸도하다', '푸른 창공', '~를(을) 타고 있던 승객' 등이 의미가 중복되는 사례다.

'아직 미지수 ⇒ 미지수 | 근거 없는 낭설 ⇒ 낭설 | 방학 기간 동안 ⇒ 방학 동안 | 불조심 유의 ⇒ 불조심(화재 유의) | 결실을 맺다 ⇒ 결실을 보다 | 격세지감을 느끼다 ⇒ 격세지감이다(격세지감이 들다) | 수혜를 받다 ⇒ 혜택을 받다 | 피해를 입다 ⇒ 피해를 보다 | 미리 예상하다 ⇒ 예상하다 | 갑자기 졸도하다 ⇒ 졸도하다 | 푸른 창공 ⇒ 창공(푸른 하늘) | 000를(을) 타고 있던 승객 ⇒ 000를(을) 타고 있던 손님'

강성곤 현 KBS 한국어진흥원 운영위원

▲ 전 KBS 아나운서.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언어특위 위원. ▲ 가천대 특임교수.

* 더 자세한 내용은 강성곤 위원의 저서 '정확한 말, 세련된 말, 배려의 말', '한국어 발음 실용 소사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