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지구 병합 노리나…이스라엘 "영장 없는 구금, 유대인 면제"

연합뉴스 2024-11-28 00:00:30

팔레스타인 주민에만 '행정 구금' 적용키로…극우파·정착민 입김 반영

'트럼프 2기' 앞두고 이스라엘내 '서안 병합' 목소리 커져

팔레스타인 주민들 조롱하는 서안지구 유대인 정착민들

(서울=연합뉴스) 임화섭 기자 = 이스라엘군이 점령 중인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영장 없이 시행해 온 '행정구금 명령'을 앞으로 유대인 정착민에게는 적용하지 않고 팔레스타인계 주민을 상대로만 실시하기로 했다.

적법절차와 기본권 훼손 논란이 거센 가운데, 이스라엘이 서안지구를 병합해버리기 위한 수순으로 이런 조치를 취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미국 NBC 방송에 따르면 이달 초 취임한 이스라엘 카츠 국방장관은 22일(현지시간) 이런 방침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서안지구에 사는 유대인 정착민들은 행정구금명령 대상에서 제외된다.

하지만 유대인이 아닌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여전히 영장이나 재판 계획 없이 이스라엘군이 무한정으로 계속 구금해놓을 수 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본부를 둔 인권단체 베첼렘(B'Tselem)에 따르면 올해 6월 기준으로 행정구금 대상 팔레스타인 주민은 3천340명으로, 작년 10월 7일 하마스의 테러공격으로 시작된 가자지구 전쟁 이전의 갑절이 넘는다.

NBC가 인용한 팔레스타인인 수감자 협회 집계에 따르면 가자지구 전쟁 개시 이래 체포된 팔레스타인 주민의 수는 1만1천800명에 이른다.

베첼렘은 팔레스타인인이 아닌 이스라엘 시민과 외국 국적자도 37명 행정구금 상태라고 밝혔다.

서안지구 경비하는 이스라엘 병사

이번 카츠 국방장관이 발표한 정책 변경을 계기로 기존 행정구금 대상이던 이스라엘 시민이 석방된 사례가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 야권 지도자 야이르 라피드는 X(옛 트위터)에 글을 올려 이번 조치가 "위험하고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극우파인 이타마르 벤-그비르 국가안보장관은 이번 조치를 찬양하면서 "다년간 진행된 정의롭지 못한 일을 바로잡는 한편 이 나라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정의를 구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서안지구는 국제법에 따라 명목상으로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행정권을 지닌 곳이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이 점령한 땅에 유대인 정착민들을 보내 정착촌을 건설하고 살도록 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런 상황을 이스라엘의 불법적 서안지구 점령으로 간주하고 있다.

유대인 정착민들을 행정구금 대상에서 제외한 이번 조치는 이스라엘의 극우파 장관들이 서안지구를 이스라엘 영토로 합병하자는 주장을 잇달아 내놓는 가운데 나와 주목된다.

베잘렐 스모트리히 재무장관은 서안지구 일부 지역을 합병해야 한다며 "때가 됐다"고 말하면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1기 트럼프 행정부 때에도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에 이스라엘의 서안지구 일부 합병 계획이 논의된 적이 있다.

스모트리히 장관은 "우리는 주권을 (서안지구에) 적용할 것이다. 우리의 미국 친구들과 함께"라고 말했다.

유대인 정착촌 근처 이스라엘군 초소 지나는 팔레스타인 노인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이나 이스라엘 극우파 인사들 중에는 최근 공개적으로 "고대 유다와 이스라엘 땅 전체에 이스라엘의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식의 발언을 내놓는 이들이 늘었다.

이런 '주권 회복' 발언은 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비상식적 발언으로 치부됐으나 최근에는 공개적으로 진지하게 이런 주장을 펴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근본주의 내지 복음주의 성향의 '기독교 우파' 미국인들 중 일부도 가세하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이 주이스라엘 미국대사로 내정한 마이크 허커비 전 아칸소 주지사는 최근 인터뷰에서 "서안지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이스라엘군이 서안지구를 점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정착촌' 대신에 '공동체'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서안지구에 사는 유대인 정착민들은 작년 10월 가자지구 전쟁 발발 이래 이스라엘 정부에 서안지구 병합을 촉구해 왔으며 트럼프 당선 이후 압박 강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

서안지구 내 실로에 있는 유대인 정착촌에 40년 넘게 살아온 이스라엘 메다드는 로이터에 "희망이 크다. 어느 정도는 들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병합을 지지하는 활동가 겸 작가다.

채텀하우스(영국 왕립 국제문제 연구소)의 중동 및 북아프리카 분야 선임 컨설팅 펠로인 요시 메클버그 교수는 미국 NBC 뉴스에 "정착민들은 자신들의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메클버그 교수는 "그들은 이 정부(이스라엘 네타냐후 정부)에 정착촌 확장에서 법 제정에 이르는 거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주문할 수 있다. 이미 가자지구에서도 정착촌 부지를 찾아보고 있으며, 심지어 레바논 남부(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한다"고 말했다.

solatid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