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38 ] 유정인 '중독의 패러다임에 관하여'

데일리한국 2024-11-25 17:29:32
유종인 평론가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유종인 평론가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현실적으로 중독에 드는 여러 이유들을 종합해 보면 그 근본적인 원인은 번민과 고통의 상황을 타개해 보고자하는 대안(代案)의 형태로 등장한다. 그러나 현실의 말초적인 대안은 오히려 일시적인 감각의 일탈을 제공할 수는 있어도 그 근본적인 활로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심신의 몰락이나 병폐를 자초하곤 한다.

중독(中毒)이라는 한자어를 살펴보면 독성의 상태 한가운데 헤어나오지 못한 지경을 지시한다. 불가에서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고통을 둑카(dukkha)라고 칭했는데, 이는 일상의 자잘한 스트레스와 불만까지 포함한다고 한다. 근데 이런 둑카의 굴레를 전환하는 방식으로 중독의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설정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자이나교 같은 경우 극한의 고통을 자임함으로써 고통을 고통으로 극복하는 수행법을 실행하기도 한다. 물론 완전한 해소나 행복의 성취가 수월하지만은 않다. 김진숙이 말하는 여러 형태의 취벽이나 취미 등이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을 일반적인 중독의 개념으로 삼지 않는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런데 화자는 그걸 중독의 심연으로 끌어들여 헤아리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피폐해지는 중독과는 다른 의미에서 거듭남의 단초를 제공하는 중독도 있다는 사실.

중독의 외연을 확장한 것은 난처한 삶의 대증요법(對症療法)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것은 금단이 아닌 향유와 음미의 영역이 될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 김진숙의 은 피폐해진 현실의 극단을 모르지 않으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중독의 또 다른 활로랄까 다른 측면을 트여보는 수필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

김진숙의 '빵굽기'는 직업적 소임이 아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베이커리를 완성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과 공력, 그리고 집중의 모드가 긴장감있게 유지되어야 한다. 자신을 옥죄고 있거나 현실적 고통들을 완충하거나 진정시키기 위한 일종의 대안적 성격의 안티테제로서의 심리적 활성으로 보는 것이 무방하다. 마음이 살아야 몸이 살고 몸이 살아야 마음도 거기에 부합하는 안정과 평화를 통해 활기를 도모한다.

속 화자가 지향하는 빵굽기나 만보 이상 걷기, 맥주 홀릭, 커피 바리스타 같은 여러 집중된 취미들은 거의 일생을 거쳐서 취벽화(趣癖化)되곤 한다. 그런데 화자한테는 몰입과 집중의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 비해 광적인 시간을 유지하고 소모한 뒤 그 대상으로부터 어느 순간 멈춰지거나 멀어지게 된다. 즉 일반적인 중독의 지속성을 중독의 몰입도로 대체한 듯하다. 그러기에 필자가 중독된 대상들은 단품목이 아니라 다품목들이다. 이를 마치 징검돌처럼 딛고 건너며 일상을 개척하는 면모가 새뜻하고 지혜롭다.

필자는 일반적인 중독성이 지니는 시간의 지속성만이 아니라 그 극적인 몰입도 쪽에 더 가까운 측면이 있다. 중독의 가치는 그 대상과의 시간의 지속성뿐만이 아니라 그 대상이나 현상과의 몰입적인 관계에 방점을 찍어 중독의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보여준다. 무엇보다 중독의 대상을 여러 대상으로 분류하는데 그 중에 인간에 대한 중독을 회의적으로 혹은 경계적인 시선으로 보는 인식이 이채롭다.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한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인용을 통해 인간에의 상처와 의미를 되새긴다. 그럼에도 “인간에 대한 중독이 있었다면 그 결과가 어떠하든 나는 좀 더 깊고 풍요로운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언술은 인간에 대한 김진숙의 인간적인 번민과 애정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인간관계의 번민과 고통을 대체할 마련이 "고마운, 무해한, 한시적인" 중독임을 김진숙은 자신의 일상을 통해 선보인다. 쉽게 동의하기도 그렇다고 반대하기도 어려운 지점이다. 그만큼 인간은 인간에게 중독의 대상이냐 아니냐는 관점이 새롭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통에 접한 화자가 다양한 형태의 일상적 취미나 "몰입"을 통해 활로를 모색한다는 지점이다. 보통 삶에 있어서 고통의 현황을 완벽히 극복하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오히려 복잡다단한 현실적 고통을 오히려 환기시키고 얼마간 진통(鎭痛)시키는 차원으로 중독은 필자에 의해 새로운 중독의 세계가 열리고 닫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필자의 일상적 노력이나 궁리가 오히려 존재의 극복이나 회복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여러 파생되는 고통의 현황이 있기는 하지만 인간이 인간에 중독되듯 자신을 몰입하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반어적(反語的)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 인간중독의 오의(奧義)야말로 헌신과 사랑 같은 절대가치의 지난함을 드러냄으로써 그 본질을 잊지 말자는 소슬한 확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유종인 주요 약력

△인천 출생 △1996년 '문예중앙' 시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 △산문집 '염전' '산책' '시로 읽는 노자이야기', 미술 에세이 '조선의 그림과 마음의 앙상블' △시집 '아껴 먹는 슬픔' '그대를 바라는 일이 언덕이 되었다' 외 6권 △시조집 '답청' '얼굴을 더듬다' '용오름'

♣김진숙-글/중독 유감

빵을 굽는다. 재료를 계량하고 반죽을 하고 몇 번의 발효를 거쳐 오븐에 넣고 굽는다. 갓 구워진 빵은 모양새는 없으나 그런대로 먹을 만할 것이다. 그러나 그 빵을 한쪽에 밀어 놓고 시계를 본다. 자정이 이미 넘었다. 나는 빵 냄새를 씻어 내고 잠자리에 든다.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벅찬 하루의 일과를 수행하면서도 머리의 일부는 내가 할 수 있는 새로운 빵의 연구에 몰두해 있다. 맡은 업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다. 세상의 누구도 타인의 머릿속을 볼 수 없음에 안도한다.

그것의 대상이 한때는 빵이었을 뿐이다. 언젠가는 식물이었고 커피였고 자전거였고 맥주였고 달리기였고 고양이었고 하루키였다. 아들이 열세 살이었을 때, 석 달가량 혼자 캐나다로 보낸 적이 있다. 아직 어린아이를 내 고집으로 덜렁 떠나보내고 걱정과 헛헛함에 아침저녁으로 뛰어다녔다.

서둘러 퇴근을 한 뒤에는 바로 4차선 갓길을 뛰었으며 잠을 설친 새벽에는 아들이 잠든 이국의 잠자리를 떠올리며 뒷산까지 달리고 와 출근 준비를 했다. 저녁 무렵 달리기 길에는 대개 붉은 노을이 있었고 새벽의 산길에는 하루도 운동을 쉬지 않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 무렵의 달리기는 내가 걱정으로부터 벗어나고 아들이 겪고 있을 '힘듦'에 같이 있고자 하는 길이었다.

구순에 가까우신 아버지가 홀로 살고 계시던 집은 내 퇴근길의 필수 경유지였다. 아버지의 저녁상을 차려 놓고 돌아서는 길은 발걸음이 무거웠다. 혼자 앉은 식탁에서 식은 국과 굳어진 반찬을 드실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은 나로 하여금 가족과의 단란한 식사를 주저하게 했다. 하나의 빈자리를 남긴 채 남편과 아들이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서서 빵을 만들었다.

빵을 만드는 것은 밥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저울과 온도계의 눈금 하나 시계의 분침 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일이다. 나는 그 일에 집중하면서 누구에게도 말 못 할 부끄러움을 잊고자 하였을까? 병들고 지쳐 나에게만 의지하는 아버지를 대면하는 일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뵙고 나설 때는 마치 숙제를 해치운 듯한 해방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 어쩔 수 없이 밀려드는 그 부끄러움. 아니면 스스로에게 단란한 저녁 식사 시간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아버지의 외로운 식사와 상쇄시켜 죄의식을 덜려고 했던 것일까?

대학교 시절은 민주화의 열기가 한창이었고 거기에 진정으로 동참할 수 없었던 나는 한동안 자기혐오에 시달렸다. 휴업으로 주체할 수 없이 많아진 시간을 자전거 타기에 몰두하였다. 꿈속에서도 자전거를 탔고 길을 걷다가도 혼자 서 있는 자전거를 보면 눈이 희번덕여졌다. 몰래 주워 타고 바람처럼 이곳을 떠 버리면 아무도 나를 못 붙들 것이며 현실의 부조리와 억압에서 자유로워질 것 같았다.

자전거라는 말만 들어도 눈이 번쩍이던 그 시절, 김소진의 '자전거 도둑'이라는 소설을 보게 된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그 소설에 심취하였고 소설에 등장하는 이탈리아 영화 '자전거 도둑'에는 더더욱 빠져들었다. 주인공 '안토니오'뿐 아니라 아내, 아들, 심지어 자전거 도둑에게까지 몰두하여 몇 번을 돌려 보았는지 모른다. 어두운 시절을 배경으로 한 흑백 영화에 빠지고 자전거 타기에 빠져서 어두운 청춘의 한 시절을 통과한 한 셈이다.

나에게는 일정 기간 특정 사물이나 행위에 대한 묘한 중독성이 있다. 삼사 년 동안 저녁마다 혼자서 마시던 맥주 한 캔은 하루를 마감하는 신성한 의식이 되었다. 맥주를 마신 후의 나는 현실과 비현실의 중간, 이른바 알딸딸한 상태가 되어 웃고 있었다. '위안을 주는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맥주의 역사와 종류, 맛 등에 대해 기꺼운 탐구를 거듭하였다.

이는 커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으며, 가볍고 세련된 하루키의 글들도 맥주나 커피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고양이를 키우면서는 세상의 모든 고양이에 빠져서 내 우뇌의 80% 이상이 모두 고양이로 채워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어떤 대상이나 행위에 흠뻑 빠져 있던, 이른바 중독되어 있던 기간은 내가 삶의 한 모퉁이를 힘들게 지나던 시기였었다. 어려운 시기에 하나의 방어 기제로서 관심을 다른 데로 분산시켰을 것이고 그렇게 내 정신과 육체를 자발적으로 소모하는 동안 힘든 시간은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런 경우, 중독이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듯하다. 중독이란 어떤 독성에 빠져 정상적으로 사물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그 대상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중독은 바람직한 상태가 아니다. 그래서 그냥 '취미'라는 말을 쓰자니 맥주를 마신 후 수북한 캔들을 몰래 숨겼다가 버리는 내 구차함이 생각나서 주저된다.

고양이 사랑을 '취미'라고 하자니 이미 애완을 지나 반려의 지위를 획득한 고양이가 도리어 나를 관찰하는 것이 취미인 듯하여 적절하지 않다. 그러면 '몰입'인가? 요즘 서점가의, '인생을 바꾸는 자기 혁명 – 몰입'이라는 문구가 생각나서 황송하다. 그냥 '중독'이라는 말. 다만 그 앞에 '고마운, 무해한, 한시적인' 이런 단어들을 슬쩍 붙여 사용하기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중독성은 오직 사물이나 현상에만 한정되어 있다. 살아오면서 한 번도 인간에게 중독된 적은 없는 듯하다. 내가 중독에 취약한 뇌 구조인 것을 스스로 아는 것이 아닌지, 그래서 인간에게 중독이 되면 그 뒷감당을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므로 무의식이 나를 저지한 것은 아닌지 가끔 생각해 본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견해가 은근히 나에게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에 중독이 되어도 좋을 나이가 지난 지금에 생각하니 그 동안의 중독에 적잖이 아쉬움이 남는다. 인간에 대한 중독이 있었다면 그 결과가 어떠하든 나는 좀 더 깊고 풍요로운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저 먼 오지의 굶주린 아이들에게 중독이 되었다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우리 사회의 차별 받는 사람들에게 중독이 되었더라면? 어떤 이성(異姓)에게 푹 빠진 인간 중독의 상태가 되어 본 적 있었더라면?

그동안의 내 중독은 다소 유감스럽다. 그러나 아마 앞으로도 이런 중독은 계속될 듯하다. 여전히 사람 아닌 다른 것에서 대상을 찾고 그 무해하고 한시적인 중독을 통해 삶의 굴레나 권태를 벗어나려 할 것 같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자신의 이러한 오랜 습성에 중독일 만큼 길들여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