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추도식 불참' 韓유족 9명, 사도광산 시찰…조선인 노동자 열악한 삶에 울컥
어제 박물관 방문 이어 오늘 '韓 추도식' 참석…"부모님이 고통받은 현장 잘 봐"
(사도[일본]=연합뉴스) 박성진 특파원 = "아버지 이름도 어딘가 적혀 있는 곳이 있을 텐데…."
25일 오전 일제강점기 조선인 노동자가 강제 노역한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 사도광산.
지난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사도광산 내에 마련된 '사도광산 근대사' 전시 패널을 살펴보던 70대로 보이는 한 한국 유족은 탄식하듯 가슴속에 맺힌 말을 내뱉었다.
이곳에는 메이지시기인 1868년 이후 광산 관련 건물과 채광 시설 등을 찍은 낡은 흑백사진이 일본어 설명과 함께 전시돼 있었다.
유족들은 시간을 들여 수십 장에 이르는 사도광산 건물 사진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사도광산 조선인 노동자 한국 유족 9명은 사도섬 방문 이틀째인 이날 오전 10시부터 약 한 시간 동안 앞선 세대가 피땀 흘린 현장인 사도광산 갱도와 전시 시설을 둘러봤다.
매표소를 지나 컴컴한 동굴 같은 사도광산 입구에 들어서자 길쭉한 갱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전구가 일정한 거리로 켜져 있지만 채굴 작업이 이뤄질 당시를 재현한 듯 갱도 안은 어두웠다.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해 지팡이를 짚은 유족 등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당시 조선인이 일했던 갱도 내부 모습을 찬찬히 살펴봤다.
갱도 내부에는 광물을 옮기는 광석 운반차가 전시돼 있었으며 갱도를 벗어나자 당시 사용된 기계시설만 모아 놓은 곳도 있었다.
사도광산은 에도시대(1603∼1867)에 금광으로 유명했던 곳으로 태평양전쟁이 본격화한 후에는 구리 등 전쟁 물자를 확보하는 광산으로 주로 이용됐다.
이 무렵 1천500여 명으로 추산되는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돼 혹독한 환경 속에서 일했다.
유족들은 현장 가이드에게 시설에 관해 물었으며 서로 낮은 목소리로 전시물에 관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유족들은 추도식을 둘러싸고 이어진 한일 정부 갈등으로 고조된 관심이 부담스러운 듯 노출을 극도로 꺼렸고, 언론과 인터뷰도 시종일관 사양했다.
이들은 앞서 일본 주최 '사도광산 추도식'을 보이콧한 한국 정부가 이날 오전 9시께 사도광산 인근 조선인 기숙사였던 '제4상애료' 터에서 별도로 개최한 추도식에 참석했다.
일본 행사 명인 '사도광산 추도식'과 달리 한국 정부 개최 행사는 '사도광산 강제동원 한국인 희생자 추도식'으로 명명해 강제동원 조선인 노동자를 추모하는 행사라는 점을 분명히 드러냈다.
추도식 도중 일부 여성 유족은 감정이 북받치는 듯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공식 추도 행사는 10여분 만에 끝났지만, 이후 유족들은 별도로 남아 추모 제단에 술잔을 올리고 고개를 숙여 고인을 애도했다.
한 유족은 "우리 부모님들이 고통받으셨던 현장을 잘 볼 수 있었다"며 슬퍼했다.
또 다른 유족은 "부모님을 모실 수 있게 됐다"며 "자손들이 부모님 기대에 부응하며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전날에는 조선인 노동자 관련 전시 공간이 있는 사도광산 옆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을 시찰했다.
한 유족은 '연초배급대장'이라고 적힌 전시물 명부의 이름이 가려진 것을 보고 "이것은 왜 이름을 지운 것이냐"고 가이드에게 물었다.
연초 명부는 사도광산 운영사가 광부들에게 담배를 지급하는 과정에서 작성한 문서인데 조선인 동향도 일부 기재됐다.
다른 유족은 1935∼1954년 무렵 사도광산에서 사용됐다는 도시락통을 보고는 "하루에 이것 하나를 먹었느냐"고 당시 조선인 노동자의 열악한 삶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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