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화학 재도약] ① 장기 불황에 파이프도 텅 비었다…석화산업 벼랑끝

연합뉴스 2024-11-25 00:00:15

줄줄이 적자에 공장 가동 중단·투자 축소 등 생존 전략 모색

업황 개선까지 시일 걸릴 듯…"수출 경쟁력 높인다면 중장기적 반등 가능"

[※ 편집자 주 = 제조업 중심인 한국 경제를 지탱해온 대표적인 기초 소재산업인 석유화학 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중국발 설비 증설로 인한 공급 과잉과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부진이 맞물려 불황이 길어지는 상황입니다. 이에 연합뉴스는 석유화학 산업의 위기 배경과 최근 업계 현황, 생존 전략과 향후 전망 등을 아우르는 기사 세 꼭지를 송고합니다.]

LG화학 여수공장

(서울=연합뉴스) 한지은 기자 = 올해 3월 석유화학 공장을 휘감은 잿빛 파이프 내부로 쉴새 없이 흐르던 스트로폼의 원료 스티렌모노머(SM)가 텅 빈 파이프만 남긴 채 자취를 감췄다.

1990년대 지어져 30년 넘게 LG화학 여수공장 한쪽을 지킨 SM공장이 중국발 공급 과잉과 수요 부진의 여파로 멈춰선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물량은 넘치고 수요는 부족한 상황에서 중간 원료 격인 SM을 생산하기 위해 공장을 돌리는 것보다 외부에서 사들이는 게 나을 수 있다"며 "업황이 좋아지면 재생산할 가능성도 있지만, 일단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24일 업계에 따르면 중국의 공격적인 설비 증설로 인한 공급 과잉과 글로벌 수요 침체에 따라 석유화학 산업 전반에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업계 곳곳에서 곡소리가 나오고 있다.

4대 석유화학 기업으로 꼽히는 LG화학과 롯데케미칼, 한화솔루션 3개 기업은 올해 3분기 일제히 적자를 냈다. 그나마 흑자를 낸 금호석유화학 또한 작년 동기 대비 영업익이 22.7% 급감했다.

LG화학 여수공장 용성단지

우리나라 석유화학 산업은 화학 산업 생산액 세계 5위, 에틸렌 생산 능력 세계 4위로 대표적인 주력 산업이지만, 2022년 하반기 이후 장기간 불황을 겪고 있다.

수익성 지표인 에틸렌 스프레드(에틸렌 가격에서 원료인 나프타 가격을 뺀 금액)는 2022년 이후 손익분기점인 t당 300달러를 밑돌고 있다. 올해 3분기 에틸렌 스프레드는 t당 186.47달러에 불과했다. 팔면 팔수록 손해가 나는 실정인 것이다.

불황의 주된 배경으로는 중국의 자급률 상승에 따른 공급 과잉과 이로 인한 가격 하락이 꼽힌다.

중국은 2014년 1천950만t 수준이던 에틸렌 설비 능력을 지난해 5천180만t 수준으로 급격히 끌어올렸다. 한국(1천270만t)과의 차이는 4배 이상이다.

과거에는 국내 기업이 수출한 석유화학 제품을 중국이 재가공하는 구조였으나, 중국이 설비를 갖추고 자급률을 높이면서 국내 기업의 수출 물량은 현저히 낮아졌다.

여기에 중국 내수 부진으로 중국의 물량이 해외로 쏟아지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제품 가격이 전체적으로 하향됐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기업도 내수 소비가 되지 않으니 '버리느니 싸게 팔자'는 생각으로 해외로 물량을 밀어내고 있다"며 "원가 경쟁력이 있는 중국이 제품을 대량 생산해 시장에 풀어놓으니 한국 기업이 밀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롯데케미칼 대산공장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부진도 영향을 주고 있다.

원자재시장 분석업체 ICIS가 지난 9월 석유화학 산업 전망 세미나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글로벌 기초화학 수요는 2017∼2020년 3.2% 증가, 2020∼2023년 3.0% 증가한 이후 2030년까지 단 2.6% 증가할 것으로 관측됐다.

석유화학 업계는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투자를 축소하고 사업 구조를 재편하는 등 생존 작업을 펼치고 있다.

LG화학은 2022년 3월 대산 SM공장을 중지한 데 이어 올해 3월 여수 SM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최근에는 여수공장의 폴리염화비닐(PVC) 생산 라인을 일부 교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롯데케미칼은 지난달 말레이시아 합성고무 생산법인 LUSR의 청산을 결정했고, 공장 가동 최적화 및 원가 절감을 위한 '오퍼레이셔널 엑셀런스 프로젝트'를 여수·대산 공장에서 진행하고 있다.

성낙선 롯데케미칼 재무혁신본부장(CFO)은 지난 7일 3분기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내년 시설투자(CAPEX)는 기존 투자 감축 목표에 추가적인 검토를 더 해 1조7천억원 수준까지 축소했다"며 "2025년 이후 시설투자는 상각 전 영업이익(EBITDA)을 초과하지 않는 수준에서 집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호석유화학 울산고무공장

업계의 이 같은 노력에도 수익성 개선을 넘어 업황이 반등하기까지는 시일이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당장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으로 원재료 가격의 불균형이 이어지고 있으며, 공급 과잉과 수요 부진을 해결할 만한 요인이 부족한 탓이다.

다만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선 성공에 따른 유가 하락, 중국의 경기 부양책으로 인한 수요 진작 등 업계에 긍정적인 시나리오도 존재한다.

한국화학산업협회 관계자는 "석유화학은 반도체와 함께 한국 경제 발전을 견인하는 핵심적인 산업"이라며 "현재 업황이 좋지 않고 불확실성이 있지만, 친환경, 고부가, 스페셜티 등 미래 먹거리 발굴과 함께 수출 경쟁력을 높여간다면 중장기적으로 반등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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