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조성진 기자] 한성은(44)은 스트링 편곡계에서 활발하게 활약하는 음악가 중 하나다.
2018년 우주소녀 ‘아이야’로 스트링 편곡가로 데뷔한 이래 태연, 에일리, 헤이즈, 에스파, 백지영, 빅마마, 허각, NCT드림, NCT127, 2AM, 하성운, 려욱(슈퍼주니어), 소유, 신용재, 손태진, 신유, 양치기소년단 등 K팝에서 트로트, 인디음악까지 6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200곡 넘게 작업했다. 미발매된 곡까지 합치면 1000곡이 넘는다. 연평균 150여 곡 넘게 스트링 편곡작업을 한 것이다.
30대 후반에 스트링 편곡자로 늦게 데뷔했지만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스타가수의 곡을 작업할 수 있던 건 그녀의 남다른 이력(감각)도 무시할 수 없다.
한성은은 이화여대 음대(98학번)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라흐마니노프, 쇼팽에 심취한 클래식 학도였지만 경희대 아트퓨전디자인대학원에선 실용음악을 공부했다. 재즈 빅밴드 시대를 대표하는 카운트 베이시의 ‘One O'clock Jump’와 ‘Shiny Stockings’ 빅밴드 편곡을 분석으로 2014년 석사 학위를 받았다. 카운트 베이시 악단만의 특징인 리프의 사용과 간결하고 두터운 재즈 사운드를 이루는 보이싱에 중점을 둔 흥미로운 연구다. 정통 클래식과 재즈 및 대중음악 이디엄 전반에 대한 감각과 다양한 편곡 스킬을 이미 이때부터 확실하게 충전한 상태였다.
스포츠한국 ‘조성진의 가창신공’에서 스트링 전문 편곡가인 ‘에임스트링’의 한성은 메인프로듀서를 만났다.
인터뷰를 위해 찾은 ‘에임스트링’은 올해 봄 강남 학동에서 한남동으로 이전했다. K팝 전반에서 영상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가진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한성은 프로듀서는 2024년부터 에임스트링 부대표로 재직 중이다. 에임과 함께한 지 4년 만에 파트너 임원급으로 고속 승진한 셈이다.
한성은 프로듀서는 2020년 ‘에임스트링’으로부터 편곡을 의뢰받았다. 이매진 드래곤 ‘Believer’, 백현 ‘캔디’ 등 3곡을 커버하는 작업이었다. 이매진 드래곤 ‘빌리버’는 반복 구간이 많았지만 재미있는 방식으로 스트링 편곡작업을 마쳤다. 유튜브에 게재하며 매우 좋은 반응을 얻었다. 결과물에 만족한 에임스트링은 함께 일하자고 제의했고 이렇게 해서 에임스트링과 인연이 시작됐다.
“에임스트링은 미디(MIDI)로도 리얼사운드 급을 내는 거로 정평 높습니다. 저 자신조차 진짜 리얼 악기로 연주한 줄 알았는데 미디란 걸 알고 놀란 적이 있을 정도니까요.”
업계에서 화제를 모은 에임의 인디음악 프로젝트는 한성은의 기획으로 시작된 것이다.
“일도 몰리는 사람에게만 몰리는 법이죠. 해보고 싶은 사람들은 많지만, 기회가 없어서 못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와중에 신입 작가들에게도 기회를 주고 실력 있는 인디 뮤지션들에게도 기회를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인디음악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된 겁니다. 인디 뮤지션들을 위해 평소보다 낮은 가격으로 스트링 세션 및 편곡작업을 진행하는 등 몇몇 예외 조항으로 더욱 많은 호응을 얻은 것 같아요.”
한성은 프로듀서에게 인디음악은 남다르다. “K팝만 하다가 인디음악을 작업하면 또 다른 인사이트가 열리는 것 같아요. 송폼도 특이한 게 있고 여러 이유로 신선한 자극을 받게 됩니다.”
반면 넥슨 게임음악과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도 함께 하며 올 초까지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한성은은 1980년 서울에서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기업(주택공사) 출신의 부동산 분야 전문가이고 어머니는 전업주부다. 5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했고 대학 시절 드럼도 배웠다. 드럼을 배운 게 이후 편곡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성은 프로듀서는 평소 스트링편곡의 세계가 너무 멋지게 보여 자신도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교회에서 알게 된 유명 스트링 편곡가 권석홍에게 지도받기에 이른다. 한성은에게 권석홍은 ‘멘토’인 셈이다.
스트링 편곡자의 길이 처음부터 쉬웠던 건 아니다.
2017년경 작업물을 최현준(V.O.S) 등 몇몇 작곡가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보냈다. 그러나 모두 연락이 없어 낙담하기에 이른다. 2개월이 지난 어느 날 최현준 작곡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트와이스 데모 작업을 하고 있는데 스트링 작업이 필요하다”는. 최현준은 3일의 시간을 줬지만, 한성은은 열정을 불태워가며 밤을 새워 하루 반 만에 완성해 보냈다.
작업물을 받은 최현준은 A4 한 장 이상 되는 분량으로 자세하게 수정을 요구했다. 이런 식으로 고치고 또 고치며 3~4차례 작업물이 오갔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결국 이 음원은 발매되지 않았다.
이후 1년간 6곡이 넘게 작업했지만 모두 채택되지 않았다. 이런 나날이 계속되며 한성은은 스트링 편곡자의 길로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바로 이즈음 맡은 곡이 최현준 김승수 작곡의 2018년 우주소녀 ‘아이야’ 스트링편곡이다. 드디어 이 곡으로 한성은은 스트링 편곡자로서 데뷔하게 된다.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던 만큼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이 곡을 수록한 우주소녀 신보 트랙 리스트를 보며 펑펑 울었다. 자신이 작업한 곡에 대한 감동과 만감이 교차했기 때문이다.
우주소녀 ‘아이야’가 좋은 반응을 얻으며 반하나 ‘그날의 온도’ 미디스트링 편곡 및 이우 ‘미리 알았더라면’ 리얼스트링 편곡을 했다. 계속 일이 들어오며 본격적으로 스트링 편곡가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
한성은은 화려한 스트링편곡 스타일로도 유명하다. 국내 최고의 스트링 세션 악단인 융스트링 관계자들은 한때 “성은아, 네 편곡은 연이어 2~3곡을 연주하지 못하겠어. 너무 힘들어”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만큼 그녀의 편곡은 난도 높은 기술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 이에 대해 한성은 프로듀서는 “처음 곡을 의뢰받을 때 어려운 기법이 들어갈 필요가 있을 때만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억에 남는 스트링편곡 작품을 몇 개만 언급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백지영 곡부터 재미있는 비하인드스토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2019년 갑자기 녹음 스케줄이 잡히는 바람에 세수도 못 하고 급히 스튜디오로 달려가 작업한 게 백지영 ‘하필 왜’다.
“백지영의 ‘하필 왜’는 몽환적인 곡이라 이런 느낌을 현악기로 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첼로로 아래쪽(저음역)을 긁거나 하며 절대 튀지 않게 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던 게 기억납니다.”
“NCT 드림 ‘Like We Just Met’ 데모곡은 어쿠스틱 기타 위주의 미니멀 편성이었어요. 그래서 원곡의 의도를 최대한 살려 편곡작업을 해서 보냈습니다. SM 측에서 ‘너무 잘 들었다’란 반응과 함께 한 군데만 수정을 요구했죠. 이렇게 초긍정 반응을 얻는 순간 기뻐서 날아가는 줄 알았어요.”
주지하다시피 SM A&R은 K팝씬에서도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작업물을 보내면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수정에 또 수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성은의 이 곡 작업에 대해서만큼은 여러 A&R들이 ‘없음’ ‘없음’이란 멘트를 달았던 것. 한성은은 NCT127 ‘너의 하루’도 스트링편곡을 맡았으며, 도영 콘서트 때 스트링편곡으로 함께하기도 했다.
“에스파 ‘목소리(Melody)’의 작곡‧편곡자는 밍지션입니다. 밍지션은 건반 전문인 만큼 굳이 스트링을 입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이미 건반으로 곡이 꽉 찬 상태였어요. 하지만 SM 측에서 에스파 ‘목소리(Melody)’에 스트링이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해서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공간이 없는데 어떠한 식으로 스트링을 넣을지 고민했습니다. 완전한 대선율만 만드는 게 아니라 멜로디가 있는 다른 악기 파트의 선율을 결합해 대선율을 만드는 작업을 했죠. 어떨 땐 밍지션 라인을 따라가다가 어떨 땐 에스파 노래 멜로디를 따라가면서도, 이게 따라가는 게 아니라 원곡 스트링 라인이 그렇게 된 듯 조화롭게 연출하려고 하는데 주안점을 두며 작업했습니다.”
“전상근 ‘나였으면’과 리누 ‘너를 버텨내는 일’도 꼽고 싶습니다. 나였으면’은 드럼에서 리듬 필인을 들으며 스트링편곡 아이디어를 얻었는데, 저 스스로 너무 잘했다고 여길 만큼 결과물을 들으며 뿌듯했습니다. 리누 ‘너를 버텨내는 일’은 또다시 이런 편곡이 나올 수 있을까라고 여길 만큼 가사에 심혈을 기울여 스트링 편곡작업을 했어요. 가사의 표현 하나하나를 현으로 표현하려 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공을 많이 들였던 것 같아요. 곡이 나온 후 너무 좋아서 숨이 막힐 정도였습니다. (웃음)”
이재호 작곡가 의뢰로 손태진 ‘그대 고마워요’ 스트링편곡을 맡기도 했다. 14인 편성의 스트링 세션 편곡으로 사운드에 풍요로움을 더해줬다.
“손태진 가수는 목소리 톤이 너무 좋습니다. 성량이든, 노래의 느낌이든, 스타일이든 손태진은 매우 깊게 잘 부르죠.”
반면 그간 했던 작품 중 가장 힘들었던 걸로 하성운이 부른 ‘더킹’ OST ‘I Fall in Love’를 꼽았다.
“‘I Fall in Love’는 남자 키로 작업 의뢰가 왔다가 다시 여자 키로 바꿔 달라는 둥 여러 차례 곡 방향이 바뀌는 바람에 무려 10차례 넘게 수정해야 했어요.”
한성은 프로듀서는 “외연적으론 K팝 아이돌과 트로트가 대세로 보일 수 있지만 개인적으론 인디 발라드와 밴드음악이 대세라고 본다”고 말했다. “독특하고 자기만의 색깔이 있는 인디 뮤지션이 드러나고 있는 것”인데 최근 ‘양치기소년단’이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여러 음악인을 언급하는 가운데 필(fil)에 대한 남다른 애정도 보였다.
“필(fil)은 볼 때마다 눈에 띄게 발전하는 게 놀랍습니다. 도대체 연습을 얼마나 하길래란 생각이 들 만큼. 필은 발라드에 최적화된 감성적 음색의 소유자입니다. 필이 노래하면 금세 거기에 동화되고 말죠. 표현력 탁월하고 발성 등 기술적인 면도 뛰어납니다. 필과 같은 가수가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종일 음악과 함께하는 만큼 휴식 땐 음악을 듣지 않는다. 고요 속에서 쉬고 싶기 때문이라고. 2살 된 강아지(믹스견)와 산책하는 걸 즐기며 가끔 영화를 보러 가는 정도가 취미생활이다. 일만 하고 살다 보니 아직 미혼이다.
한성은은 그간 스트링 편곡가로서 활동했지만 이후 작곡가로서도 일해보고 싶다고 했다. 이미 올해 에임 측과 작곡가 계약을 체결한 상태다.
“정승환, 권진아, 성시경 느낌에 저만의 스타일이 깃든 발라드를 써보고 싶어요. 물론 발라드 외에도 다양한 장르를 쓰고 싶습니다. 사람들에게 오래오래 기억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