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주문화] (97) 대를 이어 만든 제주 전통주 오메기술

연합뉴스 2024-11-17 10:02:03

고(故) 김을정 선생 딸 강경순 장인 "어머니 가장 존경…전통 이어야"

"제주 조 농사 거의 안 지어…타지역 좁쌀로 술 빚는 안타까운 현실"

인터뷰하는 강경순 장인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바람 많고 돌 많은 척박한 화산섬 제주에는 모든 것이 귀했다.

벼농사는 언감생심이고 돌투성이 땅을 일구며 힘겹게 밭농사를 지었다. 또 마실 물을 구하기도 어려워 물허벅을 지고 먼 길을 여러 차례 오가며 물을 길어 다녀야 했다.

그 옛날 쌀도 물도 구하기 힘든 제주에선 어떻게 술을 빚었을까.

제주 전통주인 오메기술의 명맥을 잇는 장인(匠人) 강경순(69) 제주도 무형유산 기능 보유자를 지난 10일 서귀포시 표선면 제주성읍민속마을에서 만났다.

◇ 좁쌀로 빚은 제주 오메기술…지역 정체성 드러내

돌이 많고 푸석푸석한 흙으로 이뤄져 있어 빗물이 고이기는커녕 바로 지하로 스며드는 제주의 땅.

제주에선 이런 땅을 '뜬땅', '식은땅'이라 불렀다.

화산섬 제주의 특징 중 하나다.

"비가 오면 물이 쑥쑥 빠져나가니 벼농사를 지을 수 없어 쌀이 귀한 곳이 제주였죠. 대신 보리, 조 농사를 지었는데 좁쌀로 술을 빚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경순 장인이 오메기술의 내력을 설명했다.

오메기술을 빚는 과정

강 장인은 "'오메기'라고 하면 사람들은 잘 몰라요. '오메가요? 과메기요?' 하면서 되묻곤 한다"며 "오메기는 좁쌀로 만든 술떡으로, 우리나라에서 떡으로 술을 빚는 곳이 두 군데밖에 없는데 그중 한 곳이 바로 제주"라고 강조했다.

다른 한 곳은 안동의 이화주다.

오메기는 차좁쌀 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익반죽한 뒤 도넛 모양 또는 둥글납작하게 만들어 삶아낸 '떡'이다.

갓 삶아낸 오메기를 으깨며 치댄 다음 보리로 만든 누룩가루를 섞어 반죽한 뒤 물을 넣어 발효시키면 오메기술이 된다.

술이 익어가면 항아리에 노란빛의 기름이 동동 뜨기 시작하는데 초겨울에 한 번 술을 담그면 이듬해 봄까지 계속해서 술을 만들어 마실 수 있었다.

마셔 없어지는 만큼 계속해서 누룩가루와 오메기떡을 반죽해 넣기만 하면 묵혀둔 술과 뒤섞여 다시 발효되기 때문이다.

오메기술은 주세법상 약주 또는 탁주로 분류돼 있다.

강경순 장인이 만든 누룩과 오메기술

항아리의 윗부분만을 따로 퍼낸 것은 맑은 노란빛을 띠는데 일종의 청주처럼 집안의 제사, 마을제 등 각종 제의(祭儀) 때 쓰였다.

누룩과 지게미가 섞인 밑부분에 남은 탁주 역시 옛날 고단한 삶의 애환을 달래준 귀한 술로 대접받았고, 이후 '좁쌀막걸리'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좁쌀 특유의 향과 함께 영양과 맛이 일품이다.

강 장인은 "지금도 마을제를 한다든지 정의현 향교에서 제를 지낼 때 항상 우리 오메기술을 쓴다"며 "제에 올릴 술을 만들 때 맨 윗부분 술을 떠다가 곱게 해서 온갖 정성을 다한다"고 말했다.

오메기술은 강 장인의 어머니인 고(故) 김을정(1925∼2021) 선생의 삶과 맞닿아 있다.

김을정 선생은 남원면장이었던 아버지를 찾아오던 많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와 함께 술 빚었다. 성읍리로 시집을 와서도 틈틈이 술을 빚었지만, 한때 가내공업으로서의 술빚기가 금지된 시절 잠시 술빚기를 그만뒀다.

1984년 성읍리가 민속마을로 지정되면서 다시 술을 빚기 시작했고 1990년 5월 제주도 무형유산 오메기술 기능보유자(옛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됐고 이듬해에는 오메기술이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제주를 찾았을 때 만찬주로 제공되기도 했다.

김을정 선생은 이어 1995년 4월 제주도 무형유산 고소리술 기능보유자(옛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1호)로도 지정되며 제주 전통주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제주 오메기술은 최근 국제슬로푸드생물다양성재단 '맛의 방주'(Ark of Taste)에 등재되며 지역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음식으로서 그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제주 전통주 역사 고(故) 김을정 선생 모형

◇ 강경순 장인, 오메기술 발전 위해 부단히 노력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다시 손녀로 대를 이어 전통의 명맥을 이어온 오메기술.

강경순 장인은 지난 2019년 어머니의 뒤를 이어 제주도 무형유산 오메기술 기능보유자로 지정됐고 앞서 2015년에는 대한민국 식품명인으로 선정됐다.

오메기술을 빚기 시작한 지 햇수로 올해 41년째가 된 강 장인은 어머니를 가장 존경한다.

그는 "어머니는 정말 강하고, 똑똑하고, 자부심이 대단한 제주 여성이셨다"며 "불행이 와도 언제나 자기 할 일만 묵묵히 하셨을 뿐 휘둘리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이어 "기쁜 일이 있어도 어디 나가 남들에게 자랑도 하지 않고 할 일만 했어요. 저는 그런 어머니 모습이 참 보기 좋았고 닮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제주 전통주 오메기술의 발전을 위해서도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강 장인은 오메기술 체험행사를 진행하면서 과거와 달리 술 빚는 방식을 정량으로 계량화해 일반인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교육받으러 다니며 다른 지역의 전통주 장인과 교류를 통해 술 제조 과정에 대한 전반적인 배움의 폭을 넓혔다.

"제주서 조 농사 거의 안 지어요"

특히, 오랜 연구 끝에 한층 더 질 좋은 전통 누룩을 생산하게 된 건 큰 보람이다.

강 장인은 "콜레스테롤에 좋은 성분을 가진 홍국(붉은 누룩)은 아무 데나 나지 않아요. 습기가 있고 중산간 지역이면서 초가집, 흙집 등에서 나오는 균인데 우리 집이 제격"이라며 "전통 초가 부엌에서 누룩 틀을 짜서 직접 만들어내고 있는데 우리 집 누룩이 좋다는 소문이 서울까지 나 각종 주문과 부탁이 들어온다"고 귀띔했다.

강 장인은 "오메기술은 제주에서 오랜 세월 이어 내려온 술이다. 우리 삶의 한 부분이고 음식의 한 종류다. 잊혀서도 사라져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전통을 이어야 할 의무가 있는 만큼 누구에게든 오메기술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다"며 "(전통을) '내 것', '자기 것'이라고 고집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다만, 오메기술 제작의 어려움도 토로하기도 했다.

강 장인은 "요즘 제주에서 무, 당근, 귤, 메밀 등 각종 특작물을 생산하고 있지만 이제 조 농사를 거의 짓지 않는다"며 "제주에서 나는 좁쌀 대신 육지(타지역) 좁쌀로 오메기술을 빚는 경우가 많다"고 털어놨다.

그는 "제주에서 나는 좁쌀로 술을 빚지 못하는데 제주 민속주라는 말을 어떻게 쓰겠느냐.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강경순 오메기술 장인의 술다끄는집

bjc@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