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 위한 전시실 첫 조성…15일 공개
유일본 등 총 8책 선보여…"조선 역사·정신 담은 살아있는 공간 되길"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한때는 푸른 빛이 감돌았을 법한 표지 곳곳이 낡고 헤져 있다. 책의 이름이 적혀 있던 부분도 사라졌다.
둥근 스티커 위에 남은 글씨는 'N.F. CHINOIS'.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약탈해 간 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한동안 '중국 도서'로 분류돼 있었던 책, 조선 왕조의 의궤(儀軌)다.
국가의 주요 행사나 의례를 상세하게 기록해 후대에 모범이 되고자 했던 의궤를 언제든 볼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조선 기록문화의 '꽃'을 위한 특별한 전시실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상설전시실 2층 서화관 안에 2011년 국내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를 전시하는 전용 공간인 '외규장각 의궤실'을 새로 꾸몄다고 14일 밝혔다.
외규장각 의궤는 조선 왕조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의궤는 한 번에 2∼9부 만들었는데, 그중 1부는 왕이 보는 '어람'(御覽) 용이었다. 어람용은 다른 의궤와 달리 귀한 옷에 쓰는 초록 비단으로 표지를 만들고 황동 장식으로 꾸몄다.
특히 정조(재위 1776∼1800)의 명을 받아 강화도 외규장각에 봉안한 의궤는 후대에 길이 전할 보물로서 왕실의 주요 물품과 함께 귀하게 여겼다고 알려져 있다.
박물관 안에 외규장각 의궤를 위한 별도 공간이 생긴 건 이번이 처음이다.
2011년 외규장각 의궤가 프랑스에서 돌아온 뒤 두 차례 특별전을 열기는 했으나, 그동안은 상설전시관 1층 조선실 한편에서만 의궤를 전시해왔다.
의궤실 조성을 담당한 김진실 학예연구사는 전시실 공개를 앞두고 열린 간담회에서 "올바른 정치를 예로 구현하고자 했던 독창적 기록물인 의궤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김재홍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서화실 안에 꾸민 의궤실과 관련해 "(상설전시관 내에서) 역사에서 미술로 넘어가는 시작점"이라며 "외규장각 의궤의 참모습을 알 수 있도록 꾸몄다"고 강조했다.
약 59평(195㎡) 규모의 공간에 들어서면 다양한 의궤 표지가 관람객을 맞는다.
외규장각 의궤 297책 가운데 230여 책의 표지를 인쇄한 책의(冊衣·책이 입는 옷)다. 귀한 옷에 쓰였던 초록 비단이 낯선 땅에 머무는 동안 상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김 연구사는 "외규장각 의궤 대부분은 1970년대 프랑스에서 표지를 현대 직물로 바꾸면서 표지가 분리됐다"며 "그 자체로 외규장각 의궤가 거친 고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의궤 2책이 놓여 있는 공간은 의궤실의 핵심으로 꼽힌다.
1776년 단원(檀園) 김홍도가 창덕궁 규장각을 그린 '규장각도'(奎章閣圖), 1880년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강화부궁전도'(江華府宮殿圖) 등을 참고해 과거 외규장각의 실내 모습을 재현하고자 했다.
'왕의 책'인 어람용 의궤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본 의궤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구성이다.
이번에 전시하는 '장렬왕후존숭도감의궤'(莊烈王后尊崇都監儀軌)는 1686년 인조(재위 1623∼1649)의 계비 장렬왕후에게 존호(尊號)를 올린 과정을 기록한 것으로, 제작 당시의 표지가 그대로 남아 있어 의미가 크다.
병자호란 이후인 1637년 종묘의 신주를 새로 만들고 고친 일을 기록한 '종묘수리도감의궤'(宗廟修理都監儀軌)는 유일한 자료로 관람객에게 소개한다.
공간 설계를 맡은 김현대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는 "가장 중요한 (외규장각) 의궤를 위한 공간"이라며 "왕의 서고에 달빛이 스며드는 느낌을 더해 공간이 갖는 상징성을 더했다"고 말했다.
의궤실에서는 조선 왕실에서 치른 주요 의례와 절차도 살펴볼 수 있다.
숙종(재위 1674∼1720)이 세 차례 가례(嘉禮·왕실 가족의 혼례)를 치른 과정을 기록한 의궤, 숙종의 승하부터 삼년상을 치르는 절차를 기록한 의궤 등이 공개된다.
자칫 어려울 수 있는 의궤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도 눈에 띈다.
의궤 원문은 한자로 기록돼 있어 알기 어려운 데다 유리 진열장 너머로만 봐야 했지만, 전시장에는 '디지털책'을 배치해 관람객들이 직접 책을 넘겨볼 수 있도록 했다.
효종(재위 1649∼1659)이 자신의 장례 절차를 설명해주는 것처럼 연출한 자료도 눈여겨볼 만하다.
각종 행사에 사용한 물품을 그림으로 기록한 도설(圖說) 3천800여 개도 확인할 수 있다. 역사학자 고(故) 박병선 박사(1923∼2011)를 비롯해 외규장각 의궤를 반환하기 위한 노력도 조명한다.
박물관은 의궤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1년에 네 차례 의궤를 교체할 계획이다. 한 번에 8책씩 연간 32책을 선보인다.
외규장각 의궤실은 국립중앙박물관을 후원하는 모임인 국립중앙박물관회와 국립중앙박물관회 젊은 친구들(YFM)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다.
YFM은 50세 이하 경영인들이 2008년 결성한 모임으로, 전시실 조성 비용 전반을 지원했다.
YFM 위원장인 송병준 컴투스 의장은 "단순한 전시실을 넘어 조선의 역사와 예술, 정신을 담아내는 살아있는 공간이 될 것"이라며 박물관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길 바랐다.
외규장각 의궤실은 15일부터 관람할 수 있다.
ye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