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히틀러의 법률가들'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에 들어선 건 공화정이었다. 왕정을 대신한 바이마르공화국은 당대 그 어떤 정부보다도 민주주의에 충실했던 혁신적인 정부였다. 민주적인 헌법을 만들었고 화폐, 세제, 철도 개혁도 단행했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은 태생부터 한계가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은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독일 정부에 부과했고, 가난한 바이마르 정부는 빚을 갚고자 돈을 마구 찍어냈으며 이는 초인플레이션을 촉발했다.
먹고 살길이 어려워지자 국민이 동요하고 사회가 불안해졌다. 극우주의자와 극좌주의자는 불안한 군중의 심리를 악용해 점차 자신들의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거리에선 폭력이 난무했다.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자 바이마르 정부는 극약처방을 단행했다. 대통령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한 헌법 48조를 제정한 것이다. 이는 극우파와 급진좌파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일종의 '고육지책'(苦肉之策)에 가까웠다.
히틀러 곁에 있는 나치주의 법률가들이 이런 '꿀 조항'을 놓칠 리 만무했다. 바이마르 공화주의자들이 질서유지라는 선의(善意)에 기초해 만든 헌법 제48조를 그들은 너무도 쉽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악용했다. 헌법 제48조가 히틀러에게 절대권력을 부여하는 '수권법'과 '민족과 국가 수호를 위한 제국 대통령령' 등 독재 조항의 밑거름이 되도록 이용한 것이다. 나치주의 법률가들은 헌법 48조에 뿌리를 둔 법률과 대통령령을 통해 시민의 거주·표현·집회의 자유 등을 보장하는 헌법 조항을 폐지할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했다.
오스트리아 빈대학의 윤리학·정치철학 교수인 헤린더 파우어-스투더가 쓴 '히틀러의 법률가들'(진실의힘)에 나오는 내용이다. 민주주의를 경멸한 바이마르공화국 법률가들이 히틀러의 전제권력과 나치의 법체제 수립을 위한 이론을 제시하고 폭력적 권력 행사를 정당화한 과정을 추적한 책이다.
저자는 나치 시대의 사법제도가 바이마르 헌법을 계승했지만, 그 과정에서 법과 도덕을 통합하고, 인종차별적 담론을 자연과학적 사실이라고 호도하는 등 심각하게 왜곡했다고 주장하면서 그 중심에는 법률가들이 있었다고 비판한다.
가령, 법학자 에른스트 루돌프 후버는 "국가의 전체성은 전체 사상과 전체 인민을 지켜낸다"며 전체국가를 옹호했고, 발터 하멜은 경찰이 "모두가 민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민족의 가치를 유지하고 창출하는 역할을 준수하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베르너 베스트는 "독일 정치체의 위생을 신중히 감독하는 기관"으로 경찰이 '인종 위생'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저자는 "법이 정치 이데올로기에 굴복하다 보면 국가권력이 일반적인 도덕과 법 기준을 전부 위반해도 이를 막는 데 실패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나치와 같은 "범죄적 정치체제"가 법을 도구화하는 걸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저자는 사법제도의 타락을 막으려면 법과 도덕을 분리함으로써 국가권력의 한계를 설정하고 개인의 내면을 보호하는 한편, 공표성, 투명성, 이해 가능성, 예측 가능성, 일관성 등 법체계의 규범적 요건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경선 옮김. 4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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