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문학 거장 레오 페루츠 '밤에 돌다리 밑에서' 초역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 백합의 지옥 = 최재원 지음.
첫 시집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로 제40회 김수영문학상을 받은 최재원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아십니까 삼각형은 가상의 도형이라는 것을 모든 도형은 상상 속의 존재라는 것을 모든 위치는 근사치라는 것을 현실에 실재의 점이란 없다는 것을 (중략) 그리고 그 세계에 저와 같은 실제의 가시의 자리는 없습니다"('10장'에서)
엽편소설처럼 서사를 가진 초반부 11편의 연작시에 등장하는 가시는 이렇게 말한다. 가시는 수많은 허상으로 이뤄져 있는 세계 속에 실존하는 자신의 위태로운 처지를 토로한다. 이처럼 시인은 얼마나 많은 허상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지 상기시킨다.
표제가 '백합의 지옥'이면서도 수록된 시에 백합은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총 9개 부제 아래 81편의 시가 수록됐는데, 부제마다 고유한 서사를 펼치거나 저마다의 정서를 담고 있다.
파격적이고 거침없는 표현과 형식이 눈길을 끈다. 가장 분량이 긴 시 '목련은 죽음의 꽃'은 160쪽에 걸쳐 이어지는데, 연과 행을 독특하게 나눠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말하는 듯한 효과를 낸다.
민음사. 432쪽.
▲ 밤에 돌다리 밑에서 = 레오 페루츠 지음. 신동화 옮김
독일어 환상 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레오 페루츠(1882∼1957)가 생전 마지막 발표한 소설로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것은 처음이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프라하를 배경으로 부유한 유대인 모르데카이 마이슬의 아름다운 아내 에스터와 괴짜 황제 루돌프 2세의 엇갈린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유대인의 종교와 문화에 기반한 마법, 유령, 꿈, 환상이 등장해 상상력을 자극한다. 프라하의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작가는 유대인들의 역사를 신비로운 분위기로 그려냈다.
독립된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는 15편의 단편이 모여 하나의 장편을 구성하는 연작 소설로, 각 이야기는 시간 순서대로 배열되지 않았는데도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황제 루돌프 2세나 랍비 뢰브,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 30년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명장 알브레히트 발렌슈타인 등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고, 작중 환상인 것만 같던 일이 진실로 드러나는 등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하다.
아직 한국어 번역이 많이 이뤄지지 않아 국내에선 다소 생소한 작가지만,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영화 감독 앨프리드 히치콕 등의 거장들이 그의 문학성을 높이 평가했다.
열린책들. 3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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