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zine] 해가 떠오르는 땅…소아시아 ① 알렉산더 대왕의 발자취

연합뉴스 2024-11-07 11:00:33

(앙카라=연합뉴스) 성연재 기자 =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를 중심으로 한 아나톨리아 지역은 예로부터 '소아시아'로 불렸다.

아나톨리아는 '떠오르다'는 뜻의 그리스어 '아나톨리'에서 왔으며,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서방에서는 이곳을 '해가 떠오르는 땅'으로 여겼다.

수천 년 역사를 가진 이 땅의 신비는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의 오리엔트 정복으로 서방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 고르디온의 매듭 푼 알렉산더 대왕

아테네와 테베 등 그리스 여러 도시 국가를 발아래 둔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 알렉산더는 기원전 334년 소아시아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때까지 소아시아 지역은 미지의 세계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소아시아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나톨리아를 정복한 뒤 페르시아다리우스 황제의 15만 대군을 이수스에서 대파하고 오리엔트를 제패할 수 있었다.

아나톨리아 중부 고르디온은 프리기아 왕국의 수도였다.

앙카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90km 떨어진 고르디온은 알렉산더 대왕에 얽힌 이야기로 유명한 곳이다.

고르디온은 최근 튀르키예의 20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곳이다.

2007년부터 고르디온의 발굴을 주도한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연구단에 따르면 고르디온은 기원전 9∼7세기 소아시아를 지배했다.

동서 무역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 잡은 이곳은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으로 서방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알렉산더의 오른팔이었던 파르메니온이 먼저 도착해, 고르디온의 장로들로부터 지지 성명을 받았다.

덕분에 알렉산더는 고르디온에 무혈입성했다.

고르디온에는 예로부터 1인용 전차와 말을 연결하는 매듭이 있었는데, 이 매듭을 푸는 사람이 아시아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이 매듭은 복잡하게 얽혀 있어 그때까지 아무도 매듭을 푼 사람이 없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은 칼을 잡고 단번에 내리쳤다.

끊긴 매듭은 이내 풀렸다. 매듭을 손으로 풀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기에 알렉산더는 그 매듭을 칼로 잘라 버린 것이다.

고르디온에 도착하니 이른 아침이었다. 13만5천㎡에 달하는 거대한 지역에는 당시 도시의 기초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곳이 한때 철기 시대 위대한 왕국의 수도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10m 높이의 거대한 돌담으로 둘러싸인 기념비적인 관문밖에 없었다.

고르디온과 얽힌 또 다른 인물이 하나 있다.

만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미다스 왕이다.

미다스는 디오니소스에게 손대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만들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음식은 물론, 자신의 딸까지, 손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게 되자 원상회복해 달라고 디오니소스에게 빌었다고 한다.

고르디온 폐허에서 2km 떨어진 곳에는 미다스 왕의 무덤이 있다.

거대한 무덤 앞에는 출입구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을 통해 지하로 난 좁고 긴 길을 통해 미다스 왕의 무덤까지 향할 수 있다.

실제 무덤은 상상도 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잘 짜인 통나무로 짜인 방에 자리 잡고 있다.

수천 년 시간이 흘렀지만 거대한 지름의 통나무는 건재했다.

◇ 대회전(大會戰)의 땅 소아시아

고르디온 근처의 드넓은 평야를 바라보면서 알렉산더의 정복 행렬이 이곳을 지나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렇게 평야가 넓게 펼쳐진 지형에서는 회전이라는 형태의 전투가 치러진다.

회전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일정 지역에 대규모의 병력이 집결하여 전투를 벌임'이라고 나와 있다.

아무것도 없이 탁 트인 평야에서 보병과 궁수, 기마병을 둔 대규모 병력 사이에서 전투가 치러진다.

알렉산더 대왕은 '사리사'라는 장창으로 무장한 중무장 보병 위주의 기존 그리스 전투 방식에서 탈피해 기병에 좀 더 무게가 실린 전략을 짰다.

알렉산더 대왕 이전의 병력 구성은 보병과 기병 비율이 10대 1 정도로 기병의 숫자가 적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말에 올라탄 뒤 두발로 디딜 수 있는 등자가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어릴 적부터 말을 타 왔던 명문 귀족 자제들만 기병으로 참여했다.

전쟁에서 메인 부대로 싸우는 것은 중무장 보병이었으며, 기병은 귀족들의 출전 경험을 쌓는 용도 정도로 활용됐었다.

이러한 기조를 바꾼 것이 알렉산더 대왕이다.

당시 마케도니아군은 사리사와 방패로 무장한 '팔랑크스'라는 이름의 밀집형 장창 보병대를 기본으로 썼다.

전투 부대원 구성에서 보병과 기병을 6대 1가량으로 맞춘 것이 알렉산더 대왕이다.

알렉산더는 팔랑크스가 전투를 벌이는 동안 기병대로 적진을 뚫고 측면과 후면을 공격하는 전술을 썼다.

다이아몬드 형태의 기병대 선봉에는 항상 알렉산더 대왕이 있었고 때로는 너무 적진 깊이 들어가는 바람에 혼자 고립돼 친위대장인 클레이토스에 의해 구출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전략으로 소아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은 타르수스 산맥을 넘어 이수스에서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3세가 이끄는 15만 대군(당시 기록 60만 명)을 2만9천명으로 무찔렀다.

알렉산더는 이어 가우가멜라에서 대회전을 펼쳐 다리우스 3세가 이끄는 25만 대군을 5만 명의 병사로 압승해 페르시아를 정복하게 된다.

알렉산더 대왕의 이수스 전투와 가우가멜라 전투는 이후 전 세계 사관학교 교범에 실리게 됐다.

이후 카르타고의 용장 한니발이 알렉산더를 모방했고 한니발을 격파한 로마의 명장 스키피오도 알렉산더의 전략을 많이 따랐다는 분석이다.

◇ 신비주의 이슬람…수피즘의 땅 코냐

앙카라에서 남쪽으로 200km 거리에 있는 코냐도 알렉산더의 발걸음이 닿았던 곳이다.

이곳의 인구는 140만 명으로, 튀르키예에서 7번째로 큰 도시다.

공항에 내린 뒤 스케줄을 살펴보다 유명한 세마(Sema) 의식이 빠진 것을 발견했다.

가이드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세마 의식 없는 코냐를 취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더니 반나절 후 급히 일정에 코냐의 세마 의식을 넣었다고 알려왔다.

대신 밤 9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식사 시간이 모자란다고 말했다.

식사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일행은 세마 의식을 지켜보는 편을 택했다.

'세마'는 800년 전 이슬람 신비주의 교파 수피즘의 선각자인 메블라나 잘랄레딘 루미가 만든 종교적 의식이다.

영어로는 세마 댄스라고 하는데 이 단어로는 뭔가 매우 부족하다. 경건하면서도 장엄한 느낌이 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의식은 신과의 교감에 이르는 과정이다.

일정이 빠듯해 밤늦게 코냐에 도착했다. 일행은 서둘러 메블라나 문화센터로 향했다. 원형으로 된 실내는 어두웠다.

잠시 기다리니 까만색 가운을 입은 남성들이 들어와 원을 그리며 섰다.

10여명의 남성 가운데서는 신분이 높아 보이는 남성 2명이 포함됐다.

남성의 장엄한 솔로 독창이 이뤄진 뒤 한명씩 차례대로 검은색 가운을 벗자 흰 옷차림이 됐고 곧바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내려졌던 팔이 몸이 돌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간다.

이후에는 고개를 하늘로 들고 신을 접하는 듯 빙글빙글 몸을 돌리며 원형인 실내를 돌기 시작한다.

긴 치마를 입은 수도승들이 한없이 360도 돌면서 무아지경에 빠진 모습을 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잠시 몇 바퀴만 그 자리에서 돌아도 어지러움을 느끼기 마련인데 어떻게 이를 극복하는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시내에 있는 메블라나 박물관도 무척이나 아름다워 꼭 방문해야 할 곳이다.

◇ 아피온카라히사르…도시를 수호하는 검은 바위 요새

앙카라에서 남서쪽으로 2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아피온카라히사르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줄여서 아피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피온에는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는 201m 높이의 거대한 바위 성채가 있다.

히타이트족이 바위산 정상에 쌓은 성이다.

이 성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프리기아인, 리디아인, 페르시아인 등 다양한 고대 문명에 의해 점령됐다.

1071년 이곳에 도착한 셀주크는 화산암 꼭대기에 있는 요새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의 이름을 '카라 히사르'(검은색 성)라고 지었다.

1927∼1938년 발행된 튀르키예 지폐 뒷면에 이 성의 모습이 들어가기도 했다.

아피온카라히사르는 자연 그대로의 샘물로 유명하다.

그래서 온천을 활용한 특유의 치료 방법과 함께 온천욕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또 비옥하고 평활한 토지 덕분에 이곳은 각종 농업이 발달했고 이를 기반으로 한 음식문화 또한 발달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아편이었다.

아피온이라는 지명도 거기에서 유래했다.

지금도 모르핀 제조 등에 활용되는 양귀비(아편) 재배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농업이 발달하다 보니 음식 문화도 발달했다.

방문 때는 때마침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아피온의 먹거리를 소재로 한 음식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아피온은 2019년부터 유네스코 미식 창의 도시로 지정된 곳이다.

다양한 부스가 차려진 음식 축제에서는 한국인의 입맛에 꼭 맞는 먹거리도 많이 선보여 깜짝 놀랐다.

가장 놀라웠던 것 가운데 하나는 핑크빛이 도는 음료수였다.

과일 주스 정도로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물김치 같은 맛을 내줬다.

일행들은 놀랍다는 반응이다.

역시 튀르키예는 우리와 무척이나 가까운 사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튀르키예의 조상은 과거 우리와 무척이나 긴밀한 관계였던 돌궐족이다.

중앙아시아에서 만주 쪽에 걸쳐 있던 돌궐은 서쪽으로 밀려나 유럽으로 향해 지금의 자리로 진출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인 대부분은 튀르키예를 아직 '토루크'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돌궐에 더욱 가까운 발음이다.

우리가 튀르키예를 돌궐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 앙카라 성에서 석양을 바라보다

프리기아인들이 세운 도시 앙카라는 오늘날 이스탄불의 수도가 됐다.

이 도시 가운데는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앙카라 성이 자리 잡고 있다.

기원전 8세기 프리기아인들이 건설한 이 성은 7세기 이후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성은 이후 비잔틴과 오스만 시대를 거치면서 개조됐다.

성벽 곳곳에 로마 시대 만들어진 대리석 등이 재사용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앙카라는 튀르키예의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정치적 중심지다.

1923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튀르키예 공화국이 세워지자, 아타튀르크는 이곳을 수도로 정했다.

앙카라 시내에는 코리아 가든이 있다.

시내 중심가 겐츨릭 공원 옆에 1971년 조성된 이 공원은 한국의 삼층석탑을 떠올리게 하는 석탑이 하나 서 있다.

한국전쟁 때 파병돼 목숨을 바친 튀르키예의 장병들을 위한 탑이다.

한국 전쟁 당시 튀르키예군이 전쟁고아들을 위해 설립한 보육원 '앙카라 학원'이 있었다.

당시 튀르키예군은 6.25전쟁 당시 1만5천여명이 참전해 741명이 전사하고 175명이 실종됐다.

또 2천68명이 부상을 했으며 1천234명이 포로가 됐다.

원래 5천명을 선발할 예정이었으나 1만5천여명이 지원해 모두 참전시켰다고 한다.

튀르키예인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형제의 나라'라는 표현을 많이 접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을 아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악수하며 반갑게 포옹하고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튀르키예인들을 만날 때마다 이역만리 동방의 나라에 와서 자신의 생명을 내걸고 우리를 지켜준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4년 1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polpor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