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명절 이튿날입니다. 성묘 후 부모님 산소에 앉아 산골 친정동네를 둘러봅니다. 어디선가 치징치징 풍물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명절 때마다 풍물 장단에 맞춰 곡절 많은 삶을 덩실덩실 몸짓으로 풀어내던 구릿빛 피부에 손마디 굵던 아재 아지매들.
'아아~~알립니다. 회관에서 급히 알립니다. 뒷골에 올려둔 아내댁이 소가 없어졌답니다. 후라시나 호야를 들고 회관 앞으로 퍼뜩 나오시기 바랍니다' 뒷산에 풀어둔 다른 소들은 해질녘에 산 아래로 내려왔는데 아내댁의 소만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조를 짠 장정들은 등불을 들고 뒷산으로 올랐지요. "아매도 이까리가 풀리가 낭게 챙챙 감깄을 끼다"라는 노인들의 말에 낫과 톱을 찔러 넣은 망태를 짊어진 채요.
집집의 며느리들은 아내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막걸리를 동이 채 이고 오고, 두레상을 안고 오고, 양푼에 물김치를 퍼 담아 왔습니다. 아내댁 마당엔 덕석 두 개가 깔렸고, 덕석 위엔 상보 덮인 두레상이 늦은 밤까지 장정들을 기다렸습니다. 깊은 밤, 허탈한 장정들은 두레상에 마주 앉았습니다. 날 밝기 전에 출발해, 몇은 봉계장으로 몇은 상목골 재 너머 어실장 소전을 살펴보고, 몇은 이웃 동네를 수소문해보기로 했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소를 쉽게 찾았습니다. 이튿날, 낯선 소가 있다며 뒷산 너머 동네에서 연락 온 것입니다. 다행이라고, 정말 다행이라며 어른들은 아내댁이 마련한 술을 마시느라 늦은 밤까지 떠들썩했습니다. 내 초등 오학년 때였습니다.
아! 그날도 떠오릅니다. 어린 내가 주전자 주둥이로 막걸리를 칠벅칠벅 흘리며 논일하는 아버지께 참을 나르던 날이었지요. 주전자가 얼마나 무겁던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습니다. 모래 깔린 봇도랑 물에는 햇빛이 반짝거렸고 내 발자국에 놀란 송사리 떼가 조르륵 물을 거스르며 달아났지요. 주전자를 받은 아버지가 논둑에 앉으며, '어이~~상초오이~~ 막걸리 한잔 하게~. 보레이. 남저어이 이짝으로 건너오게'라며 주위의 아재들을 불렀습니다.
흙 칠갑된 장딴지를 도랑물에 저벅저벅 헹군 아재들이 논둑으로 걸어와 자리를 잡습니다. 밀짚모자도 저들끼리 둘러앉습니다. 말반지기 우리 논도, 남전아재집 못자리도 잠시 조용해집니다. 물 담긴 논마다 흰 구름이 둥둥 떠 있었지요. 그때입니다.
'따따따따 따르따따, 불이야~~ 불이야~~' 건너 새들 두호댁의 보리볏가리에 불이 났습니다. 아이들의 불장난이 바짝 마른 보리볏가리로 옮겨 붙었대요. '아이구!! 저 일을 어짜꼬' 논일하던 사람들이 달려갑니다. 모춤을 내던지고 쟁기를 엎어둔 채 아카시아 가시밭을 맨발로 헤집고 갑니다. 도랑을 뛰어넘다가 미끄러지기도 합니다. '바께쓰 바께쓰' 누군가의 외침에 근처 사는 동골댁이 양동이, 세숫대야, 바가지를 안고는 불난 곳으로 내달립니다.
'불붙은 데를 넘가뿌라. 퍼뜩 뒤로 밀어뿌라 카이' 악을 쓰는 고함이 들립니다. 허겁지겁 달려간 어른들, 불붙은 볏가리 위쪽을 작대기로 확 밀어버리고는 논물과 도랑물을 퍼부어 불을 껐습니다. 다행 옆의 볏가리는 타지 않았습니다. 상촌댁 며느리가 새참 다라이를 이고 옵니다. 논일하다가 모두 불 끄러 왔으니 불난 곳으로 들고 온 것입니다. 편할 대로 우 둘러앉습니다. 두툼한 정이 맨발의 굳은살로 박인 순박한 촌부들의 모습입니다.
그 시대의 마지막 분인 두동어른이 백세 앞둔 얼마 전 등밭으로 이사했습니다. 동그마한 집 한 채 뚝딱 지어서요. 다들 만나 보셨겠지요. 요호댁, 참새댁, 화곡댁, 남전댁, 양천댁, 인동댁, 성국댁, 월남댁, 야호댁, 화안댁, 손곡댁, 안호댁, 옥산댁, 와촌댁, 와동댁, 도산댁, 범골댁, 보안댁, 신전댁 어른들. 등밭이나 뒷골, 서갓 너머에, 또는 바람으로 계십니다. '고생 많이 한 어르신들요, 지금 명절 아잉기요. 덩실덩실 한 판 놀아 보입시더'
팔월이라 추석날에 쾌지나칭칭 나네 다들 모여 놀아보세 쾌지나 칭칭 나네 나라 잃어 설움 받고 쾌지나칭칭 나네 전쟁 통에 배를 곯고 쾌지나 칭칭 나네 천수답에 산간 밭에 쾌지나칭칭 나네 이랴 이랴 소 부리고 쾌지나 칭칭 나네 나물보퉁이 이고지고 쾌지나칭칭 나네 상목골재 넘나들며 쾌지나 칭칭 나네 그러구러 한평생을 쾌지나칭칭 나네 알뜰히도 살았다네 쾌지나 칭칭 나네
'좋다!! 좋구나!' 환한 어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저 아래 당수나무숲도 흥겨운지 가지를 흔들흔들합니다.
김귀선 수필가. 사진=작가 제공◆김귀선 주요 약력
△경북 경주 출생 △계간 '문장' 수필 등단(2008) △계간 '창작에세이' 평론 등단(2014) △대구수필가협회 부회장 △계간 '문장' 편집국장 △수필집 '푸른 외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