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 4색 문화에세이-19] 김귀선 수필가 '쾌지나 칭칭나네'

데일리한국 2024-11-07 07:18:20
경북 경주 내남 박달 도진마을(1989년). 작가 고향. 사진=이외식 제공 경북 경주 내남 박달 도진마을(1989년). 작가 고향. 사진=이외식 제공

추석명절 이튿날입니다. 성묘 후 부모님 산소에 앉아 산골 친정동네를 둘러봅니다. 어디선가 치징치징 풍물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명절 때마다 풍물 장단에 맞춰 곡절 많은 삶을 덩실덩실 몸짓으로 풀어내던 구릿빛 피부에 손마디 굵던 아재 아지매들.

'아아~~알립니다. 회관에서 급히 알립니다. 뒷골에 올려둔 아내댁이 소가 없어졌답니다. 후라시나 호야를 들고 회관 앞으로 퍼뜩 나오시기 바랍니다' 뒷산에 풀어둔 다른 소들은 해질녘에 산 아래로 내려왔는데 아내댁의 소만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조를 짠 장정들은 등불을 들고 뒷산으로 올랐지요. "아매도 이까리가 풀리가 낭게 챙챙 감깄을 끼다"라는 노인들의 말에 낫과 톱을 찔러 넣은 망태를 짊어진 채요. 

집집의 며느리들은 아내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막걸리를 동이 채 이고 오고, 두레상을 안고 오고, 양푼에 물김치를 퍼 담아 왔습니다. 아내댁 마당엔 덕석 두 개가 깔렸고, 덕석 위엔 상보 덮인 두레상이 늦은 밤까지 장정들을 기다렸습니다. 깊은 밤, 허탈한 장정들은 두레상에 마주 앉았습니다. 날 밝기 전에 출발해, 몇은 봉계장으로 몇은 상목골 재 너머 어실장 소전을 살펴보고, 몇은 이웃 동네를 수소문해보기로 했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소를 쉽게 찾았습니다. 이튿날, 낯선 소가 있다며 뒷산 너머 동네에서 연락 온 것입니다. 다행이라고, 정말 다행이라며 어른들은 아내댁이 마련한 술을 마시느라 늦은 밤까지 떠들썩했습니다. 내 초등 오학년 때였습니다.

아! 그날도 떠오릅니다. 어린 내가 주전자 주둥이로 막걸리를 칠벅칠벅 흘리며 논일하는 아버지께 참을 나르던 날이었지요. 주전자가 얼마나 무겁던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습니다. 모래 깔린 봇도랑 물에는 햇빛이 반짝거렸고 내 발자국에 놀란 송사리 떼가 조르륵 물을 거스르며 달아났지요. 주전자를 받은 아버지가 논둑에 앉으며, '어이~~상초오이~~ 막걸리 한잔 하게~. 보레이. 남저어이 이짝으로 건너오게'라며 주위의 아재들을 불렀습니다.

흙 칠갑된 장딴지를 도랑물에 저벅저벅 헹군 아재들이 논둑으로 걸어와 자리를 잡습니다. 밀짚모자도 저들끼리 둘러앉습니다. 말반지기 우리 논도, 남전아재집 못자리도 잠시 조용해집니다. 물 담긴 논마다 흰 구름이 둥둥 떠 있었지요. 그때입니다. 

'따따따따 따르따따, 불이야~~ 불이야~~' 건너 새들 두호댁의 보리볏가리에 불이 났습니다. 아이들의 불장난이 바짝 마른 보리볏가리로 옮겨 붙었대요. '아이구!! 저 일을 어짜꼬' 논일하던 사람들이 달려갑니다. 모춤을 내던지고 쟁기를 엎어둔 채 아카시아 가시밭을 맨발로 헤집고 갑니다. 도랑을 뛰어넘다가 미끄러지기도 합니다. '바께쓰 바께쓰' 누군가의 외침에 근처 사는 동골댁이 양동이, 세숫대야, 바가지를 안고는 불난 곳으로 내달립니다. 

고운 단풍은 아재 어자매들의 모습. 사진=손용기 사진작가 제공 고운 단풍은 아재 어자매들의 모습. 사진=손용기 사진작가 제공

'불붙은 데를 넘가뿌라. 퍼뜩 뒤로 밀어뿌라 카이' 악을 쓰는 고함이 들립니다. 허겁지겁 달려간 어른들, 불붙은 볏가리 위쪽을 작대기로 확 밀어버리고는 논물과 도랑물을 퍼부어 불을 껐습니다. 다행 옆의 볏가리는 타지 않았습니다. 상촌댁 며느리가 새참 다라이를 이고 옵니다. 논일하다가 모두 불 끄러 왔으니 불난 곳으로 들고 온 것입니다. 편할 대로 우 둘러앉습니다. 두툼한 정이 맨발의 굳은살로 박인 순박한 촌부들의 모습입니다.

그 시대의 마지막 분인 두동어른이 백세 앞둔 얼마 전 등밭으로 이사했습니다. 동그마한 집 한 채 뚝딱 지어서요. 다들 만나 보셨겠지요. 요호댁, 참새댁, 화곡댁, 남전댁, 양천댁, 인동댁, 성국댁, 월남댁, 야호댁, 화안댁, 손곡댁, 안호댁, 옥산댁, 와촌댁, 와동댁, 도산댁, 범골댁, 보안댁, 신전댁 어른들. 등밭이나 뒷골, 서갓 너머에, 또는 바람으로 계십니다.  '고생 많이 한 어르신들요, 지금 명절 아잉기요. 덩실덩실 한 판 놀아 보입시더'

팔월이라 추석날에 쾌지나칭칭 나네 다들 모여 놀아보세 쾌지나 칭칭 나네  나라 잃어 설움 받고 쾌지나칭칭 나네 전쟁 통에 배를 곯고 쾌지나 칭칭 나네  천수답에 산간 밭에 쾌지나칭칭 나네 이랴 이랴 소 부리고 쾌지나 칭칭 나네  나물보퉁이 이고지고 쾌지나칭칭 나네 상목골재 넘나들며 쾌지나 칭칭 나네 그러구러 한평생을 쾌지나칭칭 나네 알뜰히도 살았다네 쾌지나 칭칭 나네 

'좋다!! 좋구나!'  환한 어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저 아래 당수나무숲도 흥겨운지 가지를 흔들흔들합니다.

김귀선 수필가. 사진=작가 제공 김귀선 수필가. 사진=작가 제공

◆김귀선 주요 약력

△경북 경주 출생 △계간 '문장' 수필 등단(2008) △계간 '창작에세이' 평론 등단(2014) △대구수필가협회 부회장 △계간 '문장' 편집국장 △수필집 '푸른 외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