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경제 상황 불만에 트럼프의 '바이든-해리스 무능 심판론' 작동
反이민 정서 확대도 기여…백인서 흑인·히스패닉 등으로 지지층 확대
'7월 등판' 해리스, 바이든과 차별화 실패하며 초반 상승 모멘텀 상실
(워싱턴=연합뉴스) 강병철 특파원 = 미국 대선에서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트럼프의 선거 구호)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4년 만에 재집권에 사실상 성공한 것은 이른바 '바이든-해리스 무능 심판론'이 먹혔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1기 정부 때의 독단적 국정 운영, 2020년 대선 결과 부정, 1·6 의사당 폭동 사태 선동, 4차례 형사 기소, '취임 당일 하루는 독재', '내부의 적에 군 동원' 등의 언행과 그에 따른 논란으로 재집권 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강력한 경고에도 유권자들은 대내외 정책에서 미국 국민의 이익만을 우선하겠다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다.
바이든 정부가 '바이드노믹스'(바이든 경제 정책)의 성과를 부각했으나 인플레이션을 비롯한 경제 상황으로 이를 체감하지 못한 이른바 '앵그리 화이트'(angry white·성난 백인)를 비롯한 미국 유권자들이 바이든 정부에서 일한 해리스 부통령을 향해 '해고장'을 내민 것이다.
특히 이번 재집권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깜짝 승리했던 2016년과 비교할 때 지지자들의 외연이 민주당 지지층이었던 흑인 남성, 히스패닉, 노조 등으로 확대된 가운데 이뤄졌다는 특징이 있다.
나아가 지난 7월 등판하며 '미래'를 외친 해리스 부통령이 정책과 비전 면에서 바이든 정부와 차별화하는 데 실패하면서 변화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것도 트럼프 전 대통령의 승리 요인으로 보인다.
◇ 고물가·경제 상황 불만이 '바이든-해리스 정부 심판론' 토대
바이든-해리스 정부 심판론을 내세운 트럼프 전 대통령의 승리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인플레이션 문제를 비롯해 경제 상황에 대한 유권자들의 강한 불만이 깔려있다.
특히 물가의 경우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4년 반 만에 기준 금리를 0.5%포인트 내리는 '빅컷' 결정할 정도로 최근에는 지표상으로는 안정됐으나 미국 유권자들의 체감은 달랐다.
미국의 9월 물가 상승률(근원 개인소비지출)은 2.7%를 기록하는 등 수개월째 비슷한 수준에 있지만 지난 8월 유거브 여론조사에서 미국 국민 4명 중 1명은 "현재 물가 상승률이 10% 이상"이라고 답한 바 있다.
지난달 뉴욕타임스(NYT)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5%가 '경제가 좋지 않다'고 답했다. 또 에디슨리서치가 대선 당일 공개한 출구 조사에서 전국 응답자의 45%가 자신의 경제 상황이 4년 전보다 나빠졌다고 답했다.
사실상 경제 활동 중단으로 인플레이션이 '제로' 수준이었던 코로나19 대유행 때의 기억도 유권자들의 경제 악화 체감지수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바이든 정부 들어서 일자리가 늘고 임금도 올라갔지만, 물가가 더 크게 오르면서 먹고 사는 문제는 더 어려워졌다고 느끼는 것이다.
여기에다 코로나19로 인한 실업 등에 대응하기 위해 2020년 3월 2천700조원 규모의 경기부양법을 시작으로 수차례에 걸쳐 이른바 '헬리콥터 머니'가 뿌려진 것도 트럼프 정부의 경제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요소로 꼽힌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막판 유세 때까지 "여러분의 삶은 4년 전보다 나아졌느냐"고 물으면서 표심을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바이든 해리스 정부에 대해 "끔찍할 정도로 무능하다"고 날을 세웠다.
미국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일반 미국 국민에 실제로는 해가 되는 '자해적 공약'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전 대통령이 '제조업 르네상스'를 목표로 초강경 관세 정책을 공약한 것도 트럼프 전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대한 유권자의 평가에 기여했다는 평가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모든 수입품에 대해 10~20%의 보편 관세를, 중국산에 대해서는 6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각각 공약했으며 자동차 산업 보호를 위해 중국 자동차 업체들이 멕시코에서 생산하는 자동차에 대해서는 최대 2천%의 관세까지 언급했다.
그는 이들 관세가 수입품 가격을 상승시키면서 결국 미국 소비자들에게 전가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이나 '미국 소비자에 대한 세금'이라는 해리스 부통령의 비판에 대해 "해외 업체들에 부과시킬 것", "관세가 부담되면 미국에서 미국인을 고용해서 만들면 된다" 등의 논리로 대응했다.
이 결과 트럼프 전 대통령은 대선 직전인 3일 공개된 NBC 여론 조사에서 해리스 부통령보다 경제 문제(트럼프 51%·해리스 41%), 인플레이션·생활비 문제(트럼프 52%·해리스 40%) 등에서 더 잘 대응할 것이란 기대를 받았다.
에디슨리서치의 출구조사에서는 응답자의 51%가 경제 문제 대응에 트럼프 전 대통령을 더 신뢰(해리스 47%)한다고 밝혔다.
◇ 反이민 초강경 공약에 유권자 호응…지지층도 확대
미국 내의 반(反)이민 정서도 '사상 최대 불법 이민자 추방 작전'을 공약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한 것으로 분석된다.
CBS의 지난 9월 여론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55%가 '모든 불법 이민자를 추방하겠다'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공약에 대해서는 찬성한다는 의견을 보일 정도로 강경한 불법 이민 대응에 대해서는 국민적인 지지가 드러났다는 점에서다.
에디슨리서치의 대선 당일 출구조사에서는 전국 응답자 39%가 불법 이민자를 추방해야 한다고 답했다.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은 정부가 남부 국경 통제에 실패하면서 대거 불법 이민자가 유입됐으며 이들이 강력 범죄 상승, 집값 상승, 미국인 일자리 약탈 등 사실상 모든 사회 문제의 원인이 됐다고 주장하면서 불법 이민 문제를 대선 쟁점화하는 데 성공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 과정에서 "이민자의 피가 미국을 오염 시킨다", "이민자 살인자는 그 유전자를 갖고 있다", "이웃 주민의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는다" 등과 같은 인종 차별적인 막말로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나아가 유권자 그룹 측면에서는 주요 지지 기반인 이른바 '성난 백인들(angry white)'에 더해 흑인, 히스패닉, 노조 등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들도 트럼프 전 대통령으로 일부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흑인 남성 등의 이탈로 해리스 부통령이 과거 조 바이든 대통령이 받았던 수준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여론조사가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다.
다만 백인 중 여성의 경우 과거 대선 때와 달리 '낙태권 보호'를 공약한 해리스 부통령으로 이동했다는 조사도 같이 나온 바 있다.
◇ 해리스 "다르게 했을 법한 게 없다"…바이든과 차별화 실패
해리스 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과 분명한 차이점을 보이지 못한 것도 트럼프 전 대통령의 승리 요인으로 꼽힌다.
해리스 부통령은 등판 초반에는 '자유'를 슬로건으로 젊은 감각을 앞세워 유권자와 소통하면서 상승 모멘텀을 만들었으나 이후 구체적인 공약을 통해 이런 분위기를 공고화하는 데 실패했다.
'기회의 경제'를 제목으로 중산층 확대를 위한 각종 감세 조치 공약을 내놨으나 바이드노믹스에서 미세 조정한 수준에 그쳤으며 선거 막판에는 바이든 대통령의 선거 기조였던 '민주주의 위기론'으로 기울었다.
2020년 대선 때 선명한 진보 기조로 당내 경선에 출마했던 그는 올 대선 과정에서는 셰일가스 추출법인 프래킹(수압파쇄) 허용 입장을 밝히는 등 환경, 이민, 의료보험과 관련된 이슈에서 정책을 번복하면서 반대진영의 비판을 받았다.
이런 공방 등으로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해리스 부통령은 자신만의 정치적 정체성을 만들지 못했다는 평가다.
이와 관련, 해리스 부통령이 지난달 NBC의 아침 방송에서 '당신이 지난 4년간 대통령이었다면 바이든과 다르게 할 것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떠오르는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이 해리스 부통령의 실패를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트럼프 정부에서 비서실장 대행을 지낸 믹 멀베이니 전 하원의원은 대선 전 의회 전문매체 더힐에 기고한 글에서 "해리스가 패배한다면 그것은 그녀가 '바이든과 어떻게 다른가'라는 쉬운 질문에도 답변을 못 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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