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더스] 음식은 언제나 진가를 발휘한다

연합뉴스 2024-11-02 12:00:22

아프리카 정상 환영 만찬 메뉴

모국을 떠나 영국에서의 삶이 올해로 27년째다. 강산이 세 번쯤 바뀐 제법 긴 시간을 타국에서 살았다. 타향도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이 맞는다면 영국도 절반은 내 고향이다. 하긴 영국 여권을 갖고 있으니 법적으로는 영국인이 된 지 오래다.

물리적으로 멀리 있다 보니 모국의 친구들이나 지인들과 교제가 뜸해지고, 대신 영국에서 만나는 친구나 지인들이 늘고 있다. 이들 또한 편하긴 하나 '역시 영국인'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아주 친하게 지내는 영국인 지인이 한 명 있다. 명문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금융인으로 오래 일하다 지난해 말 퇴직했다. 그는 퇴직한 다음 날 필자의 레스토랑을 찾아와 "free man(자유인)"이라며 소주 한 잔과 삼겹살을 함께 나눴다. 그는 웬만한 한국인만큼 한국을 안다. 그래서 모 지방의 홍보대사까지 맡아 매년 한국을 방문하는 영락없는 '지한파'다.

며칠 전 한국에서 온 지인에게서 식사하자는 연락이 왔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한국의 지자체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됐다. 그중 다소 놀란 사실은 상당수 지자체가 만성 적자를 면치 못한다는 것이었다. 화려한 지자체 건물, 수많은 축제와 행사 등으로 미뤄볼 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내 지식과 경험을 통해 브리핑하듯 얘기를 꺼내게 됐는데, 그 내용은 다름 아닌 관광, 그리고 음식이었다.

이를테면 서구에서 여행과 휴가는 엄청 중요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개인의 권리 정도로 생각한다. 그래서 여행이나 휴가에 대한 후일담을 주변 사람들과 반드시 나눈다. 이때 사람들이 가장 장황하게 하는 얘기는 무언가를 '보거나' '한' 것보다 '먹었다'는 것이다. 특히 그 음식이 남들이 잘 경험하지 못한 별미라든가 그 여행지에서만 먹을 수 있는 특미라면 더 대단한 자랑거리이자 즐거운 화두가 된다. 나아가 별미와 특미를 모두 갖추고 있다면 완벽한 진미로 여겨져 듣는 사람은 그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기 쉽다.

욕구적 견지에서 그 지역 음식 중에 별미만 있어도 관광의 동인으로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이 관광과 음식을 잘 연계해 활용하는 나라다. 일례로 와인, 음식, 에펠탑은 프랑스의 국가 이미지를 이루는 3대 요소다. 음식이 국가의 상징으로 확고히 자리 잡은 프랑스는 'France Gastronomie'라는 음식 소개 책자를 꾸준히 발행하면서 음식과 관광을 연계한 전략을 국가 차원에서 추진한다. 음식 역사에서 볼 때 프랑스는 중세부터 포도 농장으로 먹고살았고 계몽기 시대부터 미식을 국가 브랜드로 선택했다고 봐야 한다.

스페인도 관광객이 지출하는 먹거리 소비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스페인 특유의 해산물 위주 음식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며 국가에서 많은 홍보를 한다. 그 결과 바르셀로나의 경우 관광지출의 30%를 음식이 차지함으로써 음식이 관광산업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나아가 미식 여행상품을 개발해 관광 전략의 비중을 음식에 두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내륙은 고기 중심의 단순한 특미 전략이고, 바다와 가까운 지역은 생선 및 해산물 중심의 화려한 별미 전략으로 차별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이탈리아도 각 지역의 음식을 관광의 보조 동력으로 적극 활용하는데, 이는 이탈리아가 요즘 트렌드인 슬로우 푸드 운동의 출발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식재료와 그 지역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조리하는 음식을 관광산업과 연계해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이 또한 미식 전략 못지않게 성공적이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문화는 더 세심하게 분화한다. 즉 문화의 다양성은 문명의 발전과 상당히 밀접하다. 사람의 머리는 항상 진화하고 발전한다. 인류 역사 이래 과학의 발전이 가져다준 인류의 문명이 이를 증명해준다. 그렇기에 시대는 항상 새로운 문화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접촉할 수 있는 지형의 변화 또한 넓고 다양해졌다. 즉 사람들이 원하고, 행하고, 만족하는 대상 자체가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된다. 그러다 보니 관광의 패턴 또한 다변화를 거듭해왔고 개념 또한 바뀌어왔다. 관광을 그 무엇으로 정의하는 것 자체가 'need'(욕구)가 만들어내는 'trend'(흐름)를 규명하기에 숨이 찰 지경이다. 그만큼 문화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우리의 삶을 재촉하고 있다.

이렇게 변화를 거듭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광대국의 강자로서 굳건한 위상을 유지하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이 이외에도 동일하게 획득한 명성이 또 한 가지 있으니 앞에서 말한 음식이다. 음식이 관광산업과 환상적인 조합을 이루면서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고 국가 경제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으니 부럽기 짝이 없다.

적자를 면치 못하는 한국의 지자체들도 그 지역의 환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좋겠다. 한국은 국토의 대부분이 산이다. 그것도 삼림으로 빼곡한 산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지방도시가 청정하다. 산 좋고 물 좋은 금수강산이란 말이 아직 유효하다.

인구의 70%가 수도권 및 대도시에서 살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지방도시가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명약관화 아닐까. 청정지역으로 와서 먹고 쉬며 삶을 재충전하는 동인을 제공하는 것, 관광 그리고 음식 말이다.

단, 한 가지만 반드시 명심하자. 음식을 관광산업의 우군으로만 치부하는 정책적 우를 범하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하고 싶다. 왜냐하면 관광이 선택적 의지라면 음식은 존재를 위한 필수적 욕구이기 때문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조상들의 말씀은 정말 놀랍기 짝이 없는 혜안의 명제다. 음식은 어떤 장소에서든지 자신의 진가를 발휘한다.

정갑식 푸드 칼럼니스트

정갑식 푸드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