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서 개인전 '풍래수면시' 여는 원로작가 이강소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원로 작가 이강소(81)는 대중들에게 '오리 그림'으로 잘 알려진 작가지만 회화 외에도 조각, 설치, 판화, 영상, 사진에 이르기까지 매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1970년대 여러 실험미술 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개념적인 실험 미술을 계속해 온 작가의 작업 매체는 다양했지만, 그 속에 녹아 있는 질문과 작가 의식은 한결같았다. 그는 작가가 무엇을 만들거나 그리든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 기억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태도를 바탕에 두고 이미지의 인식과 지각을 실험해 왔다.
다음 달 1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막하는 이강소의 개인전 '풍래수면시'(風來水面時)는 이런 작가의 태도를 보여주는 작품 100여점을 모은 자리다.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작품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태도는 창작자로서 작가의 역할과 한계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1970년대 비디오 작업 '페인팅 78-1'(1978)은 작품에서 작가를 최대한 지우는 작업이다. 카메라 앞에 유리를 세워놓고 유리를 붓으로 칠하는 장면을 반대편으로 촬영한 영상작업으로, 붓질이 계속되면서 작가의 모습은 점차 사라진다. 누드 상태의 작가가 몸에 물감을 바른 뒤 천으로 물감을 닦아내고 그 천이 최종 결과물이 되는 퍼포먼스 '페인팅(이벤트 77-2)'(1977)에서도 작가의 몸에 묻은 물감을 지움으로써 회화 작업이 만들어진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구상 회화에서는 집이나 배(船), 오리, 사슴 등이 등장한다. 관객은 그림 속에서 특정한 이미지를 발견하지만 이 역시 작가가 의도한 것은 아니다.
31일 전시장에서 기자들을 만난 작가는 이를 두고 "어차피 작가가 생각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리 받아들인다면 내가 뭘 그리든 상관이 없다"면서 "내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오리가 살아있다는 흔적 같은 것이었지만 이는 작가가 바라본 오리일 뿐이고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오리가 될 수도, 병아리가 될 수도, 닭이 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무한한 해석 가능성을 열어뒀다.
작가는 1970년대 '신체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에꼴드서울' 등 여러 미술운동에 참여했고 1974∼1979년에는 대구현대미술제를 주도하는 등 실험미술 운동을 활발히 벌이며 서구의 미술 경향을 무작정 따르는 데서 벗어나 새로운 한국의 현대미술을 끊임없이 고민하기도 했다.
작가는 "당시 한국의 현대미술은 매년 서구 미술 경향의 눈치를 보고 베끼는 식으로 진행됐다"면서 "우리 미술을 현대화시켜 동료와 함께 그 물결을 타야겠다고 생각했고 현대미술 변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 돌아봤다.
전시에서는 초기 작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현대미술을 위한 다양한 노력도 살핀다.
근대 미술을 상징하는 빈 액자와 제사상을 배치한 1971년작 '근대미술에 대하여 결별을 고함'은 제목 그대로 낡은 것에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젊은 작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정물화용 박제된 꿩 옆에 꿩의 발자국을 남겨둔 '꿩'(1972년작. 2018년 재제작)은 관람객에게 꿩이 살아있었음을 떠올리게 해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다.
깨진 돌과 깨지기 전의 돌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병치한 '무제-7522'는 관람객이 머릿속에 떠올리는 돌과 실제 눈앞에 담긴 돌, 돌의 사진 이미지가 모두 '돌'로 불리지만 서로 같을 수 없는 상황을 보여준다. 똑같은 이미지를 여러 개 만들어내는 복사 매체인 판화나 사진, 비디오 작업에서도 각각의 복사본에 덧칠하거나 손을 대 오리지널 작업으로 바꾸는 식으로 같은 이미지와 오브제도 관람자의 경험, 공간, 시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서울관의 서울박스에서는 1973년 서울 명동화랑에서 열렸던 작가의 첫 개인전 '소멸'이 현대적으로 재해석됐다. 당시 작가는 전시장에 그림을 거는 대신 실제 선술집에서 가져온 낡은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 놓고 관람객들에게 막걸리를 팔았다. 작가의 존재는 최소화하고 관객 각자가 자유롭게 해석하도록 유도한 전시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관객들이 자유롭게 앉아서 쉴 수 있는 탁자와 의자를 놓았고 31일 진행된 개막식에서는 참석자들에게 50여년 전처럼 막걸리가 제공됐다.
노(老) 작가는 최근 오스트리아계 유명 화랑인 타데우스 로팍과 전속 계약을 맺는 등 국제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최근 침대에서 떨어져 다쳤다는 작가는 "이제 상당히 낡은 세대가 됐고 앞으로 이번처럼 어디 가다 넘어질 일이 많을 것"이라면서도 "이번 전시를 계기로 한국의 현대미술 작가로서 좀 더 튼튼하게 남은 시간을 국제적으로 교류하면서 열심히 작업할 것"이라고 의욕을 내비쳤다.
전시는 내년 4월 13일까지. 유료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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