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4] 이경은의 독서 에세이...마크 스트랜드의 '빈방의 빛'

데일리한국 2024-10-26 09:48:31
이경은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이경은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호퍼(HOPPER)에 관한 책들이 넘친다. 나도 몇 권을 샀다. 그 중에서 이 책이 마음에 든 것은 마크 스트랜드가 열 네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고, 미술 산문을 썼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다. 시인의 산문이다.

고백컨대 나는 시인이 쓴 산문은 잘 읽지 않는다. 문장에 과도한 감정이나 묘사가 많이 실리기 때문에 산문의 맛이 흐려지기 쉬워서이다. 혹시나 하고 읽지만 성공한 적이 드물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드문드문 읽는데, 가끔 정말 좋은 글이 있기 때문이다. 시의 분위기가 산문에 잘 배어들어 절정을 이루는 작품을 보면 존경스럽고, 수필에 대한 나의 무작정한 편애가 맥을 못 추는 것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마크 스트랜드는 호퍼의 그림을 '현실이 드러내는 모습을 넘어서는 작품'이라고 평하면서, 감각이 지배하는 '가상공간'을 이야기 한다. 책의 주제를 '공간을 읽어낸다'로 잡은 게 탁월하게 느껴진다. 평면의 그림에서 공간을 붙드는 그의 시선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책의 제목을 호퍼의 작품 중에서 으로 잡은 게 제일 맘에 들었다.

빈방에, 빛이라니. 이 빈방의 빛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 과 이다. 물론 햇볕 속의 여자, 도시의 여름, 아침 햇살 같은 이름의 작품에도 빛이 들어오지만, 그건 길게 비추는 빛이라기보다 볕뉘이다. '이미지'에 천착했던 호퍼가 우리에게 빈방과 빛을 들고 온다.

그림을 보다가 문득, 내 안의 빈방으로 가고 싶어졌다. 아무것도 없는 빈방. 물질을 들어내고 그 빈 자리에 정신이 또렷이 들어앉은 곳. 아니 그 정신마저 비운 방이다. 무소유의 정신마저 훌훌 벗어던진 ‘고요와 침묵의 방’. 마음에 뚫려 있는 구멍이 메워지고, 마음의 불안한 파도도 잠드는 방. 그곳이 명상의 방인가. 스티브 잡스는 명상을 통해 그의 일과 아픔을 가라 앉혔다는데, 나는 나의 빈방에서 무엇을 비워내야 할까.

아니 저쪽 구석 어딘가에 달려갈 수 있는 빈방이 하나 있다는 건 작은 축복일지도 몰라. 무언가 채우고 비우느라 피곤한 우리의 영혼을, 잠재우는 그런 시간.    추상미술을 하지 않으면 대접을 못 받던 시대에 호퍼는 고집스레 구상미술의 맥을 이은 화가이다. '시대정신'이란 그 동네의 주류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변부나 변두리에서 생성된 비주류에서도 나온다는 걸 보여준 예술가이다. 나는 그런 마음을 가진, 그가 좋다.

위스키의 향이 남은 하이볼에, 몬테네그로의 기타리스트 밀로쉬 카라다글리치의 'Sonata in D Minor K. 32'를 들으며 빈방에 누워 읽는 책!

◆이경은 주요 약력

△서울 출생 △계간수필(1998) 등단 △수필집 '내 안의 길' '가만히 기린을 바라보았다' '주름' 외 6권. △그 중 수필 작법집 '이경은의 글쓰기 강의노트', 포토에세이 '그림자도 이야기를 한다', 독서 에세이 '카프카와 함께 빵을 먹는 오후' △디카 에세이집 '푸른 방의 추억들' △한국문학백년상(한국문협 주관), 율목문학상, 한국산문문학상, 숙명문학상 등 수상 △현재 방송작가, 클래식 음악 극작가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