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 유종인 '사라지는 사랑의 붐빔을 걱정하다'

데일리한국 2024-10-21 22:51:30

인구 절벽이 사회적 이슈로 대두된 지 오래다. 인구절벽을 역전시키려는 제도적 차원의 정책들이 나름 세워지고는 있다. 사람이라는 말은 단수지만 인간이라는 말은 복수(複數)의 분위기를 거느리고 있다. 그런데 현실은 인간이라는 말의 뉘앙스가 예전의 조밀함에서 요즘은 성기게 된 내력을 필자는 쓸쓸한 풍경으로 아우른다. 심지어는 이러다간 원치 않는 전쟁조차 대응하지 못할 수준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전교생으로 축구팀도 못 꾸리는 지경"이라는 이 상징적인 현실은 부분적인 현황이지만 결코 지엽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불안감이 소슬하게 다가온다. 거기에 한 마을의 적지 않은 노인들이 덧없이 유명을 달리한다는 사실로부터 인구 감소의 적막감은 원시적인 자연의 분위기가 아닌 인간 세상의 적막한 현실로 도드라진다. 그 단적인 예로 "바람만이 그네를 탈 뿐"인 운동장에서 우리가 기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왁자한 아이들의 목소리는 새삼 귀하고 종요로운 생활의 배경음악임을 실감케 한다.

경륜과 관대함을 지닌 따뜻한 노인들이 머리를 쓰다듬어줄 아이들이 드물고 드물어지는 지경을 우리는 인간의 생태적 야윔이라고 불러보게 된다. 그 아이들이 사라져가는 변두리 현실은 이제 도심부에서도 심심치 않게 그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다. 어찌하여 인간은 "없어지는 만큼 채워지는 것"이라는 균형의 의미가 깨어진 것일까. 

은 인간 스스로 자연스러운 번식을 기피하는 인종적인 자살의 살풍경을 예감하는 글이다. 낳고 기르는 것이 고역이 되는 시대는 분명 어딘가 잘못돼 있다. 송혜영은 적막이 감도는 운동장의 아이들 소리가 인구 감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인구절벽의 쓰나미로 번져오지 않을까 저어한다. 야은(野隱) 길재 선생의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라는 시조 한 구절과 두보(杜甫)의 "나라는 망해도 산천은 그대로이고/ 성 안의 봄 풀과 나무는 우거지네"라는 의 시구가 갈마들 듯 떠오른다.

사람이 빠진 천하 경승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수려한 자연의 영속성이 인간의 부재 속에 무슨 조화로움이 있을 수 있으랴. 필자의 듬쑥하고 예리한 세태적 우려는 "변방부터 사라지는 아이들. 미래나 희망의 다른 이름인 아이"에 대한 푼푼한 애정에 도래샘을 대고 있다. 나고 자라고 피어나고 열매 맺고 스러졌다 다시 솟아나는 초목들처럼 결락이 없는 인구의 순환과 평형에 대한 필자의 고민은 인간 생태계의 자연스러운 복원을 궁리하게 한다. 사람도 자연이고 자연물(自然物)이라는 관점에서 그 자연 이법의 순기능에 복무해야 할 당연한 의미가 있다.

송혜영의 은 결국 사라지는 사랑으로 귀결될 불온함을 예고한다. 이 원치 않는 인간 가뭄의 징후는 사랑과 조화로움의 결락을 불식시키자는 범박하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불러일으킨다. 결국 인구의 급감은 사랑의 박약함일 수도 있다. 사랑이 넉넉하고 웅숭깊어진 곳에 사람이 붐비듯 태어난다. 그러니 사랑과 사람은 그 글자만으로도 얼마나 닮아있지 않은가. 

◆유종인 주요 약력

△인천 출생 △1996년 '문예중앙' 시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 △산문집 '염전' '산책' '시로 읽는 노자이야기', 미술 에세이 '조선의 그림과 마음의 앙상블' △시집 '아껴 먹는 슬픔' '그대를 바라는 일이 언덕이 되었다' 외 6권 △시조집 '답청' '얼굴을 더듬다' '용오름'  

♣사라지는 사람-글/송혜영

와!  애들이 논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계집아이 두엇, 사내 아이 서넛이 함께 공을 차고 있다.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놀이를 하는 풍경은 해가 뜨고 별이 지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건만. 마치 세상에 남은 마지막 아이를 본 것처럼 탄성을 지르다니...

오며가며 유심히 본 운동장에는 바람만이 그네를 탈 뿐이었다. 알록달록한 철봉과 미끄럼틀 키 큰 미루나무가 멀뚱히 서있는 운동장은 늘 비어있었다. 만국기가 펄럭이고 마을이 떠나갈 듯한 함성과 함께 아이들이 이어달리기 한 적이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교문이 시끌벅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많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제 학교는 전교생으로 축구팀도 못 꾸리는 지경이 되었다.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 삼거리 정자에 한 노인이 앉아있었다. 세상사 온갖 분별이 사라진 퀭한 눈으로 우리를 무심히 쳐다보았던 노인은 극도로 야윈 모습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어 보였던 노인은 며칠 못가 땅으로 돌아갔다.

오랫동안 영감님 병수발을 들던 이쁜이 할머니가 정작 자신은 가족의 돌봄도 못 받고 요양원에서 세상을 등졌다. 동네 아낙들 우두머리 격인 예쁜이 할머니의 유능한 참모였던 왕눈이 할머니가 대장의 뒤를 따랐다. 가겟집 아저씨와 아주머니처럼  동네 중심 세력이었던 어르신들도 차례차례 동네에서 지워졌다. 개울 건너 전직 화가가 냄비를 몇 개나 태워 먹고 선배들과 같은 수순을 밟으러 지난 달 요양원으로 떠났다. 얼굴도 모르는 노인 몇이 지난겨울부터 봄까지 저세상으로 가버렸다는 풍문이 고개를 넘어왔다. 

그들이 사라지는 건 꽃이 지고 낙엽이 떨어지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없어지는 만큼 채워지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 여겼건만. 집 지키는 이가 없는 빈집만 늘어날 뿐 아이들은 세상에 오지 않았다.

공을 차는 저 아이들은 아마 이 마을 마지막 아이일 게다. 변방부터 사라지는 아이들. 미래나 희망의 다른 이름인 아이. 아이 울음소리가 끊긴 고적한 마을은 인구절벽의 전초기지다. 밤나무도 늙고 집도 늙고 사람도 늙은 마을. 눈이 띄는 어린 생명은 개와 고양이 뿐.

동사의 공포에서 해방된 고양이들이 따스한 봄볕 아래 뒹군다. 이 계절을 맞이한 자신들이 대견해 어쩔 줄 모르는 몸짓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고양이들이 벌건 대낮에 대놓고 사랑을 나눈다. 낳아 키울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 녀석들은 오직 생명체로서의 본분에 충실할 뿐이다. 인간이 저지른 패악이 극에 달한 세상이 어찌 되든 아랑곳하지 않는 고양이들은 곧 새 생명을 잉태하고 고물고물 새끼를 낳겠지.

사람이 사라진 빈자리를 낙천적 고양이들이 넉넉하게 채워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