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수필가 11인] 김미향 '무문(無門)'

데일리한국 2024-10-20 16:31:22
사진=작가 제공 사진=작가 제공

비가 내린다. 허공이 젖고 나도 젖는다. 저녁나절에 깃든 적막한 폐사지. 부처가 없다고 사찰이 아닐까. 범종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 소리를 듣지 못할까. 폐허라도 언제나 금당이고 대적광전인 것을. 빈 윤회의 공간을 지키는 불탑이 서럽도록 장엄하다.

세월이 삼층 석탑의 기상만은 꺾지 못했다. 맨 위 노반의 한 모서리만 풍상에 내주었을 뿐 흐르는 시간에서 비켜난 듯하다. 임진왜란 때 재가 되어버린 법수사의 맥을 잇고자 석탑은 부처를 대신해 천 년이나 생불의 삶을 살아왔다. 자신을 버려둔 세상이 노여울 만도 하련만 하루하루 웅숭깊은 숨을 가다듬으며 불법을 전하고 있다. 순정한 시간 앞에 엄숙해진다.

매장 문화재 보호 및 발굴, 훼손의 행위를 금한다는 안내문이 눈길을 보내온다. 석탑과 빈터를 에두르는 경계선만 아니었다면 목탁 소리 그치지 않고 향화 끊이지 않던 불가가 여기 있었다고 누가 짐작이나 할까. 군데군데 발굴된 돌과 기왓장들이 큼직한 염주알처럼 놓여 있다. 잘 지어진 절이 아니어도 승려가 없어도 법열이 서린 절집다웠다.

저 멀리 느티나무 아래 당간지주가 보인다. 아득한 사이가 절터로 가늠되지만 이미 백성의 집이 들어서고 농작물이 뿌리를 내렸다. 초록이 우긋하다. 잘 자란 이유가 무얼까. 비법은 땅속에 있을 테지만 여름을 제 세상으로 만들어 낸 데는 드러나지 않게 축적된 자비라는 성분이 도와주었으리라. 그 공간이 아홉 개의 금당과 여덟 개의 종각, 천여 칸의 요사채를 거느린 법수사 자리였음을 삼국유사가 들려준다. 우산을 다잡아 쥐고 그곳으로 내려간다.

당간지주는 화두에 갇힌 고승이었다. 나는 비 맞은 모습을 두 눈으로 어루만지며 본디부터 박힌 조그만 돌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저 몸속에 배어 있을 과거를 상상하며 묵연할 뿐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세월의 자국에 수더분해졌지만 내 서원은 석등에 불이 켜지는 것이라고 포부를 밝히는 것 같았다. 그 발원이 이루어져 당간에 깃발이 힘차게 나부끼기를 나도 기원했다. 주위를 휘둘러보아도 일주문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헤아려지지 않는다. 잃어버린 천 년과 기다림의 천 년이 교차하는 지점을 탑과 당간지주가 서로 그윽하게 맞바라볼 따름이다. 그 옛날 법수사를 찾던 사람처럼 다시 석탑 곁으로 올라간다.

몸 하나 가눌 곳 없는 황량한 절터에 소낙비만 들이친다. 옷에 빗물이 흥건하다. 하루도 눕지 않고 굳건히 버텨온 탑 앞에서 잠시의 폭우를 견디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불도에 정진하는 석탑에게 드리는 나만의 경배의 몸짓이었다. 한참을 눈맞춤한다. 오랜 세월 자신을 이겨내며 번뇌를 여의었을 석탑, 다비식을 한다면 불사리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가야산이 폐사를 향해 머리를 다숙이고 있다. 산자락을 등 뒤에 두고 있지만 그 자락을 파고드는 이는 많아도 이곳으로의 걸음은 넉넉지 못하다. 새 한 마리 옥개석에 앉아 비를 피한다. 천년의 시공을 초월해 우리가 만난 것도 부처의 존재 때문이리라. 텅 비었어도 부처는 떠나지 않았다. 우매한 중생의 혜안을 위해 잠시 법당을 비운 것뿐이다.

생각해 보니 빈 공간 이대로도 괜찮을 듯싶다. 일주문이 없고 단청이 없으면 어떠랴. 닫집이 없고 후불탱화가 없으면 또 어떠랴. 가을이면 갖은 색깔의 단풍이 화려한 단청이 되고 짙은 초록과 들꽃이 후불탱화가 되며 물씬한 낙엽 내음이 향냄새가 되어주는 공덕이 스민 자연 그대로의 법당 아닌가.

석가모니도 법전에만 들지 않았다. 보리수 아래 앉아 깨닫고 바람에 몸을 싣기도 했다. 참된 소리를 들을 줄 안다면 장소가 무에 그리 대수일까. 아직은 꾸며지지 않아 적막하지만 전각 안 부처님이 앉은 자리 못지않게 소중한 곳이다. 그대로를 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옛 절터에서 깨닫는다.

탑을 만나고 나니 그의 존재보다 나에 대해 적잖이 생각한 시간이었다. 글을 쓴다는 핑계로 찾았지만 퍼부어 대는 빗속을 헤적이며 몸과 마음과 입으로 지은 선업을 알게 모르게 참회하고 있었다. 무량하게 쏟아지는 비가 극락의 빗발 같다. 내리는 비처럼 모두에게 안온이 고루 닿기를 바란다. 폐사지라도 머무르면 느낄 수밖에 없나 보다. 마음이 아늑하다.

편평한 기슭이 거대한 연화좌로 보인다. 이곳 금당을 지켰던 비로자나불은 지금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중생의 번뇌를 씻어주며 교화에 이바지하고 있다.  공空으로 있어도 신라의 역사는 흐르고 쓸쓸해 보여도 타오르는 불심이 있는 이곳이야말로 문 없는 문, 진정한 무문관이 아닐까.

천 년 묵은 흙냄새가 코끝에 감돈다. 천 리를 달려온 바람도 허공에서 부양 중이다. 막 맥박이 뛰기 시작했다. 법수사의 지문을 만져볼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그날을 위해 삼층 석탑과 당간지주는 오늘도 내일도 불멸의 부처를 안고 잠들고 깨어날 것이다. 눈부신 햇살 속에서 금빛 범종 소리가 들려올 날을 염원하며 부처의 땅을 빠져나온다. 

김미향 수필가. 사진=주간한국 제공 김미향 수필가. 사진=주간한국 제공

◆김미향 주요 약력

△경북 영덕 출생   △2016년 수필과비평 등단   △등대문학상, 호국보훈문예, 동서문학상, 포항바다문학제 수상 외 다수  △대구수필가협회, 대구수필과비평작가회의, 대구수필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