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수필 공간] 이용옥 수필가 '들길을 걷는다'

데일리한국 2024-10-20 21:28:47
이용옥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이용옥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바람에 가을이 얹혔다. 냇물도 계절을 아는지 한 옥타브 낮춰 졸졸거린다. 한낮의 햇살만은 쨍하게 매운 게 곡식을 익히고 푸성귀를 키우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 같다.

이런 날은 들길을 걷고 싶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 장난스런 바람이 엉덩이를 들썩이면 겁쟁이 벼이삭들이 다투어 얼굴을 숨기던 곳, 무거운 머리채를 어쩌지 못해 노란 비명만 질러대던 나락들의 터. 그 사이를 걸으면 새 쫓던 아이 소식을 들을 수 있으려나. 이 쪽에서 “훠이!” 목소리를 높이면 반대쪽에서 되돌아오던 "훠이 훠어이!" 피난살이라도 하듯 이 논 저 논으로 쫓겨 다니던 새떼들.

그 새들이 마음 놓고 배를 불리는 공간이 있었다. 새 쫓는 아이의 눈을 붙들고 목소리를 앗아간 새떼의 동맹군은 소설책이었다. 로 시작해서 , 를 거쳐 와 까지. 이어지는 이야기가 궁금한 아이는 책을 덮지 못했고 땅거미 질 무렵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없던 시절이었다. 식구들 뒷바라지에 허덕이는 어머니를 생각했다면 좀 더 철저한 방위군이 되어야 했다. 좋아하던 쌀밥이 그 작은 벼톨들이란 걸 생각했다면, 온 들판의 평화가 우리 집 나락들을 내어주고 얻은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렇게 태평하진 못했을 텐데. 하지만 쥬디를 향한 키다리아저씨 마음이 사랑일지 모르는데, 석순옥의 피가 아모로겐인지 아우라몬인지 궁금한데, 어떻게 책을 덮을 수 있을까. 로체스터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던 제인에어처럼 그땐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오늘 참회의 참새지킴이를 해야 할 것 같다. 종종걸음으로 새떼를 따라 다니며 훠이훠이 목청껏 참새를 쫓아야지. 졸고 있는 허수아비를 깨우고, 허공에 묶인 반짝이 줄까지 찰랑찰랑 흔들어주면 그 옛날 내 허물을 용서받을 수 있을까. 가뭄과 홍수의 훼방에도, 천둥과 번개의 위협에도 물꼬를 놓지 않았던 아버지께도 얼마간은 속죄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아주 잠시, 옛날처럼 한눈도 팔아야겠다. 해와 땅, 비와 바람이 키운 이 곡식들엔 참새같이 작은 생명들 몫도 얼마간은 들어있을 테니까.

오늘 같은 날, 논두렁엔 누렇게 여문 콩꼬투리가 사부작거리고 바지런한 농부들은 가을걷이에 바쁠 게다. 이미 몇 다랑이 논의 벼들은 제 그루터기를 베고 누웠고, 아직 서있는 벼 포기들 사이로는 놀란 메뚜기들이 팔딱거리겠지. 나는 이름 모를 사람들의 일터에 그들처럼 바지를 걷어 올리고, 서슴없이 맨발을 들이고 싶다. 발바닥에 닿는 서늘한 기운과 발가락을 파고드는 진흙의 간질임. 어린볏모를 키워 나락을 밀어올린 어머니 같은 흙. 폭풍우 속에서도 벼 뿌리를 붙들고 버텨라, 버텨라 힘줘 소리쳤을 땅. 그 위대한 대지의 숨결을 느껴보리라.

한 줄로 늘어선 볏단들이 서로의 어깨에 기대 머리채를 말리는 동안, 두런거리는 일꾼들 이야기에도 끼어들고 싶다. "바심 끝나면 강씨 아저씨네 아들이 장가 간다네유" "무죽배 큰집 막내딸이 짝이라더만" 나는 그들 틈에서 익숙한 말투로 추임새를 넣으리라. "아, 그류? 참 잘 됐네유" 힐끗 돌아보는 사람들 눈빛이 오래 알아온 사람처럼 따스하리.

들밥을 인 아낙들이 동구에 나타난다. 머리엔 광주리, 한 손엔 주전자. 또 한 손 휘저으며 걸어오는 들밥행렬. 광주리를 받아놓고 베보자기를 걷어본다. 가마솥에 갓 지은 풋콩밥과 감자조림, 잉걸불에 구워낸 간갈치와 고추장장떡. 금방 무쳐낸 가지나물에 그제 담근 배추김치, 그리고 고추장파래김!

벼 벨 날이 가까워오면, 어머니는 부추를 베어 씻어 송송 썬 후, 잘 익은 고추장에 버무렸었지. 당원이라도 몇 알 섞었던가, 참기름 서너 방울을 떨어뜨렸던가. 달착지근한 양념고추장을 파래 위에 쓱쓱 바르고 깨소금 한줌 뿌려 멍석에 널면, 햇빛은 말리고 바람은 날리고. 가랑잎처럼 바스락거리던 고추장파래김. 매콤달콤 고소한 그 맛이 혀끝에 감돈다. 밥 광주리 속엔 필시 그 맛도 담겨있으리.

도랑물에 손을 씻은 일꾼들이 제 숟가락도 챙기기 전에 이웃부터 불러들인다. 들밥에는 주인과 객이 따로 없다. 보이면 부르고, 불리면 식구다. 손 큰 주인 아짐은 밥도 국도 수저도 넘치게 준비했을 터, 아낙들은 부리나케 아욱국 한 양재기를 퍼 안긴다. 밥을 키워낸 들판에서 밥을 거두는 사람들의 들밥 한 상이 느껍다.

막걸리 한 순배를 돌린다. 대접 가득 찰랑이는 술, 둥그렇게 둘러앉아 하늘바라기하며 다 함께 꿀꺽이는 모습이 무슨 의식이라도 치루는 것 같다. 저 마술의 액체가 목젖을 타넘으면 햇볕에 찌든 시커먼 얼굴에 불콰한 웃음이 노을처럼 번지고, 꺼져드는 삭신에도 또 불끈 힘이 솟으리. 밥 한술을 더 권하며, 찬그릇을 서로에게 밀며, 볏섬만한 밥숟가락으로 허기를 채우는 사람들. 주고받는 덕담 속에 흐드러진 웃음소리. 일찍 수저를 놓은 누군가는 육자배기 한가락을 뽑았던가, 젓가락 장단에 어깨춤이라도 추었던가. 넉넉하게 부른 배와 빗장 풀린 마음으로 들판은 어느새 잔치집이 되어가리.

밥을 나눈다는 것은 마음을 나누는 것, 누군가를 품에 품고 감싸 안는 것. 더없이 아끼고 다독이는 것. 밥으로 빚은 훈훈한 풍경, 저 그림에서 나는 지금 얼마만큼 떨어져 서있는 걸까.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차오른다. 나는 그것을 밥이려니 하고 꿀꺽 삼킨다.

다시 또 남은 길을 걸으리. 아직 가지 않은 길. 논둑길 모퉁이 신작로엔 코스모스 꽃물결이 아롱대려나, 그 맞은 편 돌무더기에선 억새 하얀 꽃이 손 흔들며 반기려나. 동경인지 그리움인지 알 수 없는 아련함에 옛날인지 지금인지 분명치 않은 시점의 나는 아직도 들길을 걷는다. 마음에만 남은 흑백 사진에 물감 칠해 총천연색으로 살려내고 싶은, 오늘 같은 날이면.

◆ 이용옥 주요 프로필

△계간수필 등단(2013), 한국수필 평론 등단(2022) △수필집 '석모도 바람길' △수필미학 문학상, 율목문학상, 공무원문예대전 희곡, 동화 부문 수상 △계수회, 수필문우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