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보는 세상]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는…….

연합뉴스 2024-10-19 10:00:29

(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는 한자어 그대로 해와 달, 다섯 산봉우리를 그린 그림이다.

덕수궁 중화전 일월오봉도

지폐 사용 빈도가 점점 떨어지는 신용화폐 시대지만, 우리는 이 거대한 '자연'을 사실상 매일 지니고 다닌다. 1만 원 지폐 속 세종대왕 초상 뒤에 드리운 그림이다.

1만원 지폐 '일월오봉도'

조선시대 기록화에선 임금이 있을 자리에 임금 대신 일월오봉도를 그렸다. 임금 부재 때도 일월오봉도가 있으면 왕이 주관하는 행사임을 표상했다. 병풍으로 제작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한자어인 '병(屛)'을 써서 '일월오봉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조 9년(1785) 그려진 '을사친정계병(乙巳親政契屛)'에서도 일월오봉병 자리가 정조 자리다.

'을사친정계병(乙巳親政契屛)' (1785)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하나인 '시경(詩經)' 중 '천보(天保)' 편은 임금이 오래 살기를 축원하는 내용으로 읽는데, 이를 채택해 회화로 만든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중국이나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는, 조선만의 것이었다는 점이다.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해와 달이 나란히 떠 있고, 산 다섯 봉우리가 폭포와 어우러져 균형과 대칭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소나무는 푸름과 번성의 상징이다.

권력을 상징하는 도상임과 동시에 통치 철학을 자연으로 은유한 '음양(陰陽)'과 '오행(五行)' 철학의 종합이다.

철학적 사유보다는 단순한 기원을 담은 그림으로 보기도 한다. 해는 임금이며, 달은 왕비를 의미한다. 이 둘 이외 달, 산, 물, 소나무는 모두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에 포함되는 자연이다. 왕과 왕비의 무병장수를 축원한 그림으로 여긴다.

일월오봉도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왕을 상징하고, 왕과 함께 움직이며, 왕이 죽으면 왕과 함께 묻힌 '관화(官畵)'였으나, 조선이 몰락한 이후엔 민간에서 즐겨 그리기 시작해 현재 대표적인 '민화(民畵)'가 됐다.

지난 6월 서울 세빛섬에서 열린 'K-ART 페스타'는 민화 세계를 알리는 대규모 전시였다. 다수 '일월오봉도' 작품이 전시됐는데, 하지윤(1964~) 작가가 그린 '일월오봉도'(2024)를 보자.

하지윤 '일월오봉도'

위 그림 부분

정통 도상에 입체감을 입힌 옻칠 작품이다. 하 작가가 한 편의 시처럼 쓴 일월오봉도 해설은 해, 달, 산 등이 가진 철학적 사유를 함축하고 있다.

"해는 달을 부르고/ 달은 해를 따르며/ 밤낮으로 유희하네.

물은 나무를 생하고(水生木)/ 나무는 불을 생하고(木生火)

불은 흙을 생하고(火生土)/ 흙은 바우를 생하고(土生金)/ 바우는 물을 생하여(金生水)

살리고 살리는 기운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니/ 다함이 없어라.

찬 기운과 뜨거운 기운이 만나 물을 만드니/ 기운의 세계가 물질의 세계로 모양을 갖춘다.

물의 시작으로 물질세계의 순환이 거듭되니/ 이 도상의 위력은 실로 대단하다.

조선의 왕이 일월오봉도 앞에 앉으면/ 우주의 시작과 무궁함이 그를 비호(庇護)한다"

비슷한 시기 경기도 양주 안상철 미술관에서 열린 '온전한 나'에 전시된 정재은 작가의 '일월오봉도'(2017)는 남다른 고민이 스민 작품으로 여겨진다.

좌우 대칭이라는 기초 도상을 넘어 물에 비친 그림자를 추가해 상하 대칭을 달성했다. 유교 세계에 도교 선경(仙景) 세계를 추가한 듯하다.

정재은 '일월오봉도'

전형적인 관화에서 민화로 옮겨갔지만, 여전히 관(官)에서 가장 사랑하는 그림이라는 증거가 있다. 지금 '대통령실'로 이름이 바뀐 최고 권력 기관 '청와대'에서 제일 눈에 띄게 전시했던 그림이었다.

국무회의가 열리던 청와대 세종실에 장식된 그림이었는데, 비판과 논란이 끊이지 않아, 걸렸다가 교체되고, 다른 그림으로 대체되는 등 여러 번 우여곡절을 겪은 그림이다.

청와대 본관을 처음 만든 노태우 대통령 때부터 문재인 대통령 때까지 '권력'을 상징하는 '청와대 컬렉션'(청와대가 소장하거나 대여한 미술품) 대표 작품이었다.

노태우 정부 청와대 세종실 국무회의 모습. (1993년 11월)

문재인 정부 청와대 세종실 국무회의 모습. (2022년 5월 3일)

영구와 순환은 자연의 속성이다. 그에 비하면 인간의 삶과 권력은 참으로 짧다.

일월오봉도를 사랑하는 마음은 권력에 대한 '동경'이 아니며 자연에 대한 '찬양'도 아니어야 한다. '그저 그대로'인 존재를 바라보며 유한한 삶의 가치를 깨닫는 일이어야 한다.

doh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