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건축가 김원의 세상 이야기 ⑬ 우리 출판사 첫 책

연합뉴스 2024-10-19 00:01:07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김원 건축가

정확히 48년 전인 1976년에 나온 우리 출판사(나는 젊은 시절 '도서출판 광장'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했다)의 첫 책은 '한국의 고건축'(전7권)이라는 거창한 사진집 시리즈의 첫 권 '종묘'편이었다.

당시까지 사진의 최고 거장이던 故 임응식 선생의 사진으로 새롭게 조명된 종묘의 아름다운 사진은 관심 없던 사람들의 눈을 크게 띄워주었다.

양장에 영국 수입 켄트지에 흑백사진을 2도 때로는 4도 인쇄까지 서슴지 않고 최고만을 주장한 사진집은 단번에 장안의, 특히 건축계에 화젯거리가 됐다.

표지제자(表紙題字)는 유명 서예가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의 서체를 받아 썼고 동아일보의 대 사진기자 이명동(李命同) 선생이 신문에 "우리 것을 알자"라는 내용의 서평을 근사하게 써 주셨다.

그런데 그때 사실 나는 약관 서른세 살의 사회 초년생으로서 '건축연구소 광장'을 처음 차린 병아리 건축가였고 출판에는 전혀 경험이 없는 신출내기였다.

다만 욕심과 열정만으로 그런 엉뚱한 일을 대책도 없이 벌였는데 하여튼 시작은 거창했다. 나는 스승이신 김수근 선생이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며 '작품'을 만드는 데 전념하는 것 외에도 '공간'이라는 멋쟁이 잡지를 만들어 세상을 계도하겠다던 큰 꿈을 수행해 나가는 것을 경이로운 눈으로 보고 자랐다.

스승과 함께 그 일을 오래 도왔던 터라 나도 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건축가라는 직업이 훌륭한 건축 작품을 만들어 사회에 공헌하고 본인의 입신양명을 추구하는 것이 일이겠지만 그것이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책에 굶주렸던 기억 때문이기도 했다.

인문학 서적도 좋은 책이 귀했지만 특히 건축학의 전공서적들은 구하기도 힘들고 너무 비싸서 기껏 큰마음을 먹으면 대만(Taiwan)에서 온 복사판 원서(原書)들을 사서 좋아라고 들여다보던 것이 한국 실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후배들에게 좋은 책을 만들어 주겠다는 갸륵한 결심을 하고 김수근 선생은 잡지를 하셨으니 나는 단행본을 많이 만들어야겠다고, 경험도 없는 출판사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 첫 번째 시련은 '출판사 등록'이라는 엄청난 절벽으로 다가왔다. 박정희 대통령 때 그가 '출판'이라는 걸 싫어했던지 그 등록이라는 행정 절차가 마치 방송국이라도 설립하는 것만큼이나 까다롭고 어려웠다.

정말 사돈의 팔촌까지 신원조회를 받아야 했으니 그건 한마디로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가까스로 그 난관을 거치고 나니 출판, 인쇄의 사정이 내가 공간 시절에 겪었던 것보다는 훨씬 더 열악한 것이었고 특히 사진 작품을 인쇄하는 수준은 아주 후진적인 수준이었다. 그래도 나는 '최고'를 고집하며 계속 네 권을 출간했다.

종묘에 이어 비원, 경복궁, 소쇄원이 나왔다. 나는 네 권이 나오면 그 팔린 돈으로 다섯 째 책의 제작비만 나온다면 그 다음부턴 재정적으로 부드럽게 굴러가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좋은 평판과는 달리 책은 팔리지 않았고 돈이 안 들어와서 종이값, 인쇄대, 외상이 천정부지로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2년 만에 일곱 권을 끝으로 빚 독촉에 항복, 손발을 들고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에 임응식 선생님과 밤을 새워 만들어 낸 '종묘'는 하버드 대학의 옌칭(燕京) 라이브러리에 비치되었고 '소쇄원'(瀟灑園)은 그 아름다운 모습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지만 그 모든 것은 한 젊은이의 설익은 꿈의 실패담으로 기록되고 끝이 났다.

소쇄원

40년이 지난 2016년에 삼성문화재단과 리움 미술관에서 그때 그 슬픈 이야기를 기쁜 이야기로 바꾸어 줄 엄청난 자금지원 제안이 왔다. 임응식 선생은 고인이 된 지 오래시지만 주명덕, 배병우, 구본창, 김재경 등 그 쟁쟁한 후배들이 한국 건축사진의 명백을 이어 받아 '땅의 깨달음-한국의 건축'이라는 초호화판 사진전집이 출간됐다.

'한국건축예찬-땅의 깨달음' 전시 열리는 삼성미술관 리움

나의 출판사 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이 사진집을 들여다보며 지난 2016년 73세 나이에 40년 전의 꿈을 이루는 행복을 새삼 맛봤다.

사진작가 배병우 촬영 '창덕궁 부용지 설경'

김원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독립기념관·코엑스·태백산맥기념관·국립국악당·통일연수원·남양주종합촬영소 등 설계. ▲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삼성문화재단 이사, 서울환경영화제 조직위원장 등 역임. ▲ 한국인권재단 후원회장 역임. ▲ 서울생태문화포럼 공동대표

* 자세한 내용은 김원 건축가의 저서 '행복을 그리는 건축가', '꿈을 그리는 건축가', '못다 그린 건축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성도현 기자>

raphael@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