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3] 이경은의 독서에세이...알폰시나 스토르니의 시선집 '달콤한 고통'

데일리한국 2024-10-18 22:03:52
이경은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이경은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음악을 들을 때 한 곡을 여러 가지 버전으로 듣는다. 같은 곡이라도 가수와 편곡, 나라에 따라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다. 음악 극작가를 하다가 생긴 버릇인데, 한번 몸에 밴 습(習)을 떼어내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라는 음악이 제법 듣기가 괜찮았다. 그래서 변주곡들을 찾아서 하나씩 듣기 시작했다. 거의 50여 개 정도가 있었다. '바다'라는 스페인어는 알아듣겠고, 알폰시나가 뭔가 궁금했다. 찾아보니 아르헨티나의 시인 알폰시나 스토르니 (Alfonsina Stroni)였다.

100년 전 지구 반대편에서 한 여류시인이 고통을 겪으며 시를 썼고, 21세기가 되어서야 그녀가 시가 한국에 도착했다. 아르헨티나와의 거리가 그토록 멀었나. 그렇게 모르다니. 모르고 살아도 아무 문제는 없다. 하지만 알폰시나를 스쳐지나가는 순간 가슴 끝이 아릴 것이다. 이유도 알 수 없이... 음악이 시인을 데려다 주었다.

아르헨티나는 독특한 나라이다. 문화적으로 선진국이라는 자부심이 강하고, 보르헤스 같은 훌륭한 작가를 많이 배출했고, 피아졸라의 탱고가 있으며, 국민들이 책 읽기를 좋아하고,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엘 아테네오' 서점이 있는 나라이다. 나는 반도네온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피아졸라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출렁댄다. 아르헨티나의 탱고 시대를 연 탱고 혁명가 옆에, 우리들의 영원한 혁명가 체 게바라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뻐근해진다.

그런데 이런 멋진 나라도 여류작가에 대한 차별과 장벽은 예외가 없다. 왜 여자들에게 세상은 그리도 야박할까. 뭘 어쨌다고... 그녀는 스무 살부터 아들 알레한드로를 키운 싱글 맘이고, 열정적 페미니스트이며, 딸을 가진 아버지들이 책을 읽지 못하게 금지시킨 나쁜 책의 작가이고, 늘 가난에 시달렸으며, 사랑을 잃어버린 여자이며,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3인의 여류시인으로 선정되었지만 삶은 나아지지 않았고, 지독한 고통을 몰고 온 암을 앓다가, 아들을 등 뒤에 두고 스스로 삶을 중단시켰다. 나는 그녀의 아들이 평생 교사로 97세까지 살았다는 말에 감사의 기도가 나왔다.

얼마나 숨죽이고 참았을까, 그토록 치명적인 고통을 달콤하다고 말할 때까wl... 가 그녀의 시인줄 알았는데, 아르헨티나 작곡가 아리엘 라미레스와 시인 펠릭스 루나가 그녀의 영혼을 위해 작곡하고 노랫말을 쓴 것이었다. 이 노래는 '인류의 목소리'라 불리는 민중가요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에게 헌정된다.

"Dormida, Alfonsina, vestida de mar. (잠들다, 알폰시나, 바다의 옷을 입고.)" 노래의 마지막 가사이다. 저 기막힌 운율이라니!

붉은 벨벳 같은 피노 누아 와인 한 잔과 메르세데스 소사의 거친 목소리로 듣는 책!

◆이경은 주요 약력

△서울 출생 △계간수필(1998) 등단 △수필집 '내 안의 길' '가만히 기린을 바라보았다' '주름' 외 6권. △그 중 수필 작법집 '이경은의 글쓰기 강의노트', 포토에세이 '그림자도 이야기를 한다', 독서 에세이 '카프카와 함께 빵을 먹는 오후' △디카 에세이집 '푸른 방의 추억들' △한국문학백년상(한국문협 주관), 율목문학상, 한국산문문학상, 숙명문학상 등 수상 △현재 방송작가, 클래식 음악 극작가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