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닥 위의 즉흥 춤…국립현대무용단 '내가 물에서 본 것'

연합뉴스 2024-10-18 12:00:54

기술과 몸의 관계 춤으로 표현…'독특한 음향'·'계란 퍼포먼스' 등 눈길

'내가 물에서 본 것' 공연 장면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차가운 스테인리스 바닥 위로 무용수들이 괴성을 지르며 머리카락을 잡고 뛰어다니다 어디로 숨어버린다. 이내 뒷걸음질로 나타나더니 입안 가득 머금고 있던 물을 뱉어 몸을 적신다.

지난 17일 LG아트센터서울 시그니처홀에서 처음 공개된 국립현대무용단의 신작 '내가 물에서 본 것'은 한동안 한국 무용계를 떠들썩하게 만들 문제작이다.

인공수정 등 보조생식기술(Assisted Reproductive Technology, ART)을 중심으로 현대 사회의 기술과 몸의 관계를 춤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안무가 김보라가 자신의 보조생식기술 체험을 토대로 안무를 구성했다.

'내가 물에서 본 것' 공연 장면

모호한 주제와 갈피를 잡기 어려운 안무를 추구하는 김보라의 작품답게 관객이 맥락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은 작품이다. 일단 작품의 추구하는 주제가 예사롭지 않다. 작품 제목의 '물'은 액체가 아니라 '물질'(matter) 또는 '문제'(matter)의 의미를 지닌다. 물질인 인간의 몸이 기술과 얽혀 새로운 의미의 문제를 생성하고, 무용수들은 끊임없이 움직임을 변화하고 재구성해 작품의 주제를 형상화한다.

세세하게 짜인 동작 없이 설정된 규칙에 따라 무용수들이 즉흥적으로 춤을 춘다. 작품의 시작은 안무가의 몫이었지만, 최종 결과물은 무대 위 무용수들의 '애드리브'에 달린 셈이다. 이 때문에 관객은 공연마다 조금씩 다른 춤을 만나게 된다.

'내가 물에서 본 것' 공연 장면

이번 작품에선 독특한 음향 연출도 눈길을 끈다. 객석에는 클래식 음악이 흐르지만, 무용수들이 서 있는 무대 위에는 낯선 기계음과 잡음이 들린다. 두 소리는 처음에는 구분돼서 들리다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섞이면서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안무가가 병원 복도에서 대기하면서 들었던 클래식 음악과 병원 기계음의 묘한 섞임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공연 중간 한 무더기의 무용수들이 계란을 머리에 이고 무대에 등장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어느새 무대 바닥은 계란으로 가득 차고, 무용수 한명이 그 사이를 위태롭게 지나다니며 춤을 춘다. 계란을 밟을 것 같은 무용수의 아슬아슬한 움직임에 공연장은 순식간에 긴장감이 감돈다. 다행히 계란은 단 한 개도 깨지지 않은 채 무용수의 춤이 멈춘다.

'내가 물에서 본 것' 공연 장면

'계란은 이제 무사하다'라는 관객의 안도감은 얼마 가지 않아 철저하게 배신당한다. 갑자기 나타난 무용수가 계란을 하나하나 줍더니 냅다 공중으로 던져버린다. 차디찬 스테인리스 바닥엔 계란 파편이 낭자해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이 예상하는 방향으로는 절대 나아가지 않겠다는 안무가의 고집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인간 이후의 세계인 '포스트휴머니즘'을 표방하는 이 작품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기계와 기술을 상징하는 스테인리스 바닥 위에서 생명을 의미하는 인간의 몸과 계란의 형상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작품의 주제에 터 잡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다.

19일까지 LG아트센터서울 시그니처홀에서 공연된다.

'내가 물에서 본 것' 공연 장면

hyu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