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의 가창신공] 이나일, 국내 정상의 K팝 스트링 편곡가

스포츠한국 2024-10-18 11:02:30
사진=조성진 사진=조성진

[스포츠한국 조성진 기자] “스트링을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곡 전체 분위기가 확 바뀔 수 있습니다. 꽉 채워도 재미없게 채울 수 있고, 간결해도 의미 있게 간결할 수 있는 거죠. 이처럼 스트링 편곡의 세계는 다양한 갈 길이 있어 그 매력은 끝이 없습니다.”

“스트링 편곡자는 다른 사람이 만든 곡에 풍성하고 예쁜 옷을 입혀주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태연, 소녀시대, 아이유, 에이티즈, 레드벨벳, 엔믹스, 러블리즈, 엑소, 2AM, 에이핑크, 임창정, 효린, 박보람, 아스트로, 송소희, 조항조 등 K팝 아이돌에서 발라드, 트로트까지. 그리고 ‘웰컴 투 삼달리’, ‘드림하이’, ‘흑기사’, ‘미씽나인’, ‘동네변호사 조들호’, ‘하이클래스’ 등등 여러 드라마 OST 등 20년 넘는 경력 동안 2500여 곡을 작업한 국내 정상의 스트링 편곡가 이나일(42‧이주영)이 한 말이다.

그간 이나일이 편곡한 곡들은 화제의 중심에 섰다. 아이유 ‘좋은 날’을 비롯해 소녀시대 ‘Kissing You’, 태연 ‘When I Was Young’, 이무진 ‘에피소드’, 샤이니 ‘별빛 바람’, 조원선 ‘아무도 아무것도’, 그리고 에이티즈 ‘Outro long journey’ 등등.

이나일의 작품은 아이돌 40%, 발라드 40%로 K팝 비중이 절대적이다. 트로트 등 그 외 장르는 20%다. 트로트 편곡에 대한 관심도 큰 만큼 앞으로 이 장르 작업도 좀 더 열심히 하고 싶어한다.

편곡을 시작하며 ‘이나일’이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주영이란 이름이 흔해서 특이한 이름을 사용하고 싶던 중 세계에서 제일 긴 강인 ‘나일강’에서 따온 것이다.

스포츠한국 ‘조성진의 가창신공’에선 ‘짧고 굵게’ 보다 ‘길게 한 우물만 파는’ 스트링 편곡자 이나일을 만났다.

최근 이나일이 작업한 여러 곡 중엔 YG엔터의 신예 걸그룹 ‘베이비몬스터’도 있다. 다양한 스트링 편성의 편곡 작업인 만큼 거기에 맞게 작업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국내 굴지의 연예기획사가 야심 차게 선보이는 팀에 이나일이 함께 하는 만큼 이 곡도 화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에이티즈 ‘Outro : Long Journey’ 스트링 편곡자도 이나일이다. 이 곡을 쓴 이든(Eden)에 대해 이나일은 “이러저러한 아이디어가 많은 작곡가로, 늘 재미있는 작업을 많이 맡기는 사람 중 하나”라고 했다.

이나일 편곡자는 작업을 의뢰받아 곡을 처음 접할 때 공간이 있는지 여부부터 체크한다. 보내온 곡이 너무 꽉 차 있어서 굳이 스트링이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작품들도 있다. 이럴 땐 솔직하게 의뢰 측에 “넣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해준다. 따라서 그녀가 말하는 ‘빈 공간’이란 좋은 의미의 표현이다.

아이유 ‘좋은 날’은 이나일이 유명 스트링 편곡자로 우뚝 서게 된 곡이다. 이 곡도 처음 받았을 때 “공간이 많이 비어 있었”다. 따라서 그만큼 현이 화려하게 메꿀 자리들도 많았던 것. 그래서 이나일은 아이유의 ‘좋은 날’에서 무언가 더 많이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이 곡은 시작부터 스트링의 움직임이 많다. 한 곡에서 이만큼 많은 분량의 스트링 연주가 종횡무진하며 곡에 활력을 주는 방식은 이전까지 가요사에서 쉽게 보기 힘들었다. 아이유 ‘좋은 날’을 들을 때 스트링 파트가 없다고 여기고 곡을 감상한다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이유 ‘좋은 날’ 스트링 편곡을 마친 트랙을 처음 듣고 이 곡을 쓴 작곡가 이민수조차 매우 낯설어했다. 스트링 세션에 참여한 심상원과 김미정 같은 베테랑도 촘촘히 쌓아놓은 엄청 많은 음표 구성의 악보를 보고 “와, 이거 너무 힘든 거 아냐”라는 반응을 보였다.

어쨌든 아이유 ‘좋은 날’의 폭발적인 인기를 계기로 이나일은 유명 편곡자의 대열에 들어섰다. 물론 이 곡이 준 임팩트가 너무 강해 이후 이나일은 ‘화려한 작업에 강한 편곡자’란 선입견이 생기게 됐지만.

“아이유의 ‘좋은날’은 스트링 편곡자로서 제 인생에 분기점이 된 의미 있는 작품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복잡하고 어렵게 편곡하는 스타일이란 말을 많이 듣게 됐습니다. 음표가 적고 심플한 편곡 작업도 꽤 많이 했는데도 말이죠.”

이나일은 그간 편곡한 많은 곡 중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는 작품으로 아이유 ‘좋은 날’, 샤이니 ‘별빛 바램’, 조원선 ‘아무도 아무것도’, 이무진 ‘에피소드’, 소녀시대 ‘Kissing You’ 등을 꼽았다.

“샤이니 ‘별빛 바램’은 하나하나씩 올라가며 절정으로 치달았다가 다시 하나하나씩 내려오는 구성의 방식으로 작업했습니다.”

“조원선 ‘아무도, 아무것도’는 4명 구성의 스트링 진행으로, 처음 곡이 왔을 때 이것 역시 좋은 의미로 비어 있는 공간이 많았어요. 그래서 간주 등 여러 부분에서 재미있게 해보려고 했죠. 화려한 스트링 편곡기법은 아닙니다. 첼로 연주만 20~30초 나오는 부분도 있는 등 악기별 특징을 잘 나타내는 데 주안점을 두려고 했어요. 간주 부분도 바이올린이 잘 살아있게 하려고 했고….”

“이무진 ‘에피소드’는 ‘좋은 날’ 같이 화려하고 존재감 있는 스트링 편곡을 지향했습니다.”

이나일이 초등학교때부터 함께한 영창 피아노. 지금까지 작업실에서 사용하고 있다. 이나일이 초등학교때부터 함께한 영창 피아노. 지금까지 작업실에서 사용하고 있다.

“소녀시대 ‘Kissing You’는 제 스트링 편곡 세계의 또 다른 계기가 된 작품입니다. 당시 가요계에선 댄스음악에 스트링을 삽입하는 경우가 드물었어요. 곡을 처음 받고 간주부터 저를 위해 공간이 많았다고 느꼈어요. 곡마다 나쁘게 비어 있을 수도 있고 좋게 비어 있을 수도 있는데 이 곡은 너무 좋게 비어 있었습니다. 저는 소녀시대 ‘키싱 유’ 이전까진 바이올린‧비올라‧첼로를 모두 사용하는 방식의 스트링 편곡 작업을 했어요. 그런데 당시 황성제 작곡가가 제게 이런 말을 해주었어요. ‘스트링 편곡을 할 때 굳이 3개의 악기로 다 채울 필요는 없다. 때론 바이올린 또는 첼로만 나와도 되는 것’이라고. 이 말에 자극받아 ‘Kissing You’에서 악기 하나만으로 채우는 방식을 처음 시도했습니다. 인트로부터 바이올린만으로 연주가 나옵니다.

이전까진 첼로가 없으면 왠지 스트링 편곡이 옷을 다 입지 않은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키싱 유’에서 하나의 악기만 시도했는데 곡과 잘 어울렸고 작곡가도 마음에 들어 했어요. 이렇게 해서 확신을 갖게 됐고 이후 다른 곡에서도 이런 방식을 쓰게 된 것입니다.”

태연 ‘When I Was Young’은 이나일이 가장 좋아하는 방식의 피아노 코드보이싱 방식이다. 따라서 그만큼 편곡 영감도 금세 떠올라 불과 1~2시간 만에 작업을 끝냈다. 태연 ‘U R’도 남다른 스트링 편곡 시도로 당시 편곡계에서 많은 화제를 모았다. 피아노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가는 통상적인 스트링 편곡 방식과 달리 스트링 악기 연주를 많이 쪼개며 액센트를 주는 방식으로 ‘U R’이라는 심플한 편성의 곡에 생기를 더했다. 이런 방식의 편곡은 기성 편곡자들이나 전공생들 사이에서도 참고할만한 텍스트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했다.

반면 임창정 편곡 작업은 언제나 힘들다고 했다. 임창정은 스타일이 굳어지는 걸 경계하는 가수라서 항상 음악적으로 새로운 걸 추구하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만큼 편곡자에게 주문하는 내용도 많을 수밖에 없다.

트로트, 국악 등을 좀 더 신선한 방식으로 스트링 편곡 작업을 하고 싶은 바람도 크다.

“트로트에서 늘 해오던 여러 악기 편성의 스트링이 아니라 2~3명의 소편성 스트링 구성으로 트로트 편곡을 해보고 싶어요. 국악에 스트링을 색다르게 섞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이나일은 어릴 때부터 청음이 좋은, 타고난 절대음감의 소유자다. 주변에서 “너는 청음이 남다르니까 전공을 작곡과로 해라”고 권유한 것도 이 때문이다. 클래식 전공의 학생 시절부터 토이(유희열), 윤상 등을 좋아하던 가요 팬. 특히 윤상의 열혈 매니아였다. 그래서 작곡을 전공하면 이런 곡을 쓰는 법도 배우는 줄 알았다고 한다.

서울대 음대 1학년 재학 중이던 2002년 1월에 편곡자로 데뷔했다. 일찍 데뷔한 데엔 작곡가 유정연의 도움도 적지 않다. 이나일 막내 삼촌의 친구가 유정연 작곡가였다. 그래서 이나일은 삼촌에게 “소개 좀 해달라”고 여러 차례 조른 끝에 만나게 된 것.

이후 유정연이 자신의 곡을 스트링 녹음할 때 이나일이 스튜디오로 놀러 갔고 이곳에서 박인영 등 유명 관계자들을 처음 만나게 된다. 유정연 곡을 편곡하면서 여기저기에서 편곡 의뢰가 끊이질 않고 들어왔다. 월평균 7곡 이상 작업할 만큼 많은 곡을 편곡하며 고액 소득자가 됐고 이미 프로페셔널 편곡자로 명성을 얻기에 이른다. 물론 여기엔 이나일의 역량이 그만큼 좋았기에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다. 편곡 초기엔 자신의 작업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 울기도 했다.

박인영은 자신에게 의뢰가 들어온 곡도 이나일에게 주며 한번 해보라고 할 만큼 이나일이 편곡가로 우뚝 서는 데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람으로 류이치 사카모토와 박인영을 꼽았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현재까지 그녀의 편곡 롤모델이기도 하다.

“박인영 님으로부터 배운 게 너무 많아요. 제가 하는 모든 걸 인영이 언니한테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예전엔 나 이런 것도 할 수 있어 등 보여주기식 편곡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스트링이 좀 나댄다고 할까요? 그러나 지금은 딱 있어야 할 곳에만 있게 하는 내공이 생긴 것 같아요. 힘을 빼는 방법을 알았다고 할까요?”

이나일은 가벼운 록 스타일의 음악을 좋아한다.

휴식 시간엔 빌리 조엘, 류이치 사카모토, 히사이시 조 등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 신곡을 찾아서 듣는 타입이 아니라 옛날에 많이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듣는 걸 좋아한다.

“스트링스와는 거리가 멀지만. 데이식스의 곡을 좋아합니다. 원필 솔로앨범에 스트링 편곡 작업도 했지만, 모든 걸 떠나 데이식스 같은 음악이 제 취향에 너무 잘 맞아요.”

이나일은 현재 숙명여대 음대 대학원에서 첼로를 전공 중이다. 이나일은 현재 숙명여대 음대 대학원에서 첼로를 전공 중이다.

편곡 철학

“이나일하면 어려운 편곡 방식을 선호한다는 통념이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연주자들이 연주하기 편한 편곡 방식을 추구하고 있어요. 음악적으로만 그런 게 아니라 부수적인 것들, 예를 들어 악보도 예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연주자들이 편하고 쉽게 볼 수 있는 악보를 만들어 주려고 합니다. 좀 더 보기 편한 악보를 위해 세션 연주자 관점에서 생각하며 악보 만들고 있어요. 사이즈 조절이나 한 줄에 몇 마디에 들어가게 하면 시각적으로 더 보기 좋은지 등등 여러 관점에서 고민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긴장‧자극을 주는 편곡자

“서동환입니다. 많은 관계자가 너도나도 서동환을 언급했기 때문에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 첫 만남은 얼마 전 아이유 콘서트 때였어요. 서동환은 정말 남다릅니다. 그는 하나하나 쪼개어 존재감을 보여주는 방식의 편곡이 아니라 스트링의 전체적인 움직임에 대해 많이 고민하는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위쪽(고음)의 움직임을 중요시하며 신경을 쓰지만, 서동환의 경우 전체적으로 폭넓게 움직이는 느낌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서동환의 작업 방식은, 스트랑 안에 여러 레이어가 있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아요. 보통 두꺼운 한 개의 레이어로 움직이게 스트링을 만들지만, 서동환은 레이어1이 있고 레이어2, 레이어3이 있고 하는 식으로 여러 레이어가 군데군데에서 치고 나오는 방식의 스트링 편곡 스타일입니다. 서동환처럼 여러 방면으로 스트링을 고민하는 편곡자는 처음 본 것 같아요. 편곡만 잘하는 게 아니라 곡도 잘 씁니다.”

“서동환이 더 이상 스트링 편곡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같은 편곡자들의 밥그릇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존재이므로. (폭소)”

이나일 is

1982년 호주 태생. 2녀 중 장녀. 2살 때 서울로 왔기 때문에 호주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함. 아버지는 바이오 관련 회사 CEO /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 / 유치원에 들어가며 피아노 시작. 초교 2학년 때 바이올린 병행. 선화예중, 서울예고에서 바이올린 전공. 바이올린을 하던 중 악관절(턱)에 문제가 생겨 작곡으로 전향. 서울대 음대(01학번) 작곡학사. / 동아방송예술대, 한양여대에서 4~5년 넘게 오케스트레이션 강의. / 현 숙명여대 음대 대학원에서 첼로 전공. / 취미 식물 가꾸기 등등. / 인생영화는 ‘그랑블루’, 그리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 그의 영화는 고민을 많이 하게 하므로. / 인상 깊게 본 드라마는 ‘나의 아저씨’

이나일은 대중음악 외에 2020년부터 서울시향(서울시립교향악단)과 풀 오케스트레이션 편곡 작업을 하고 있다. 지난 9월 21일 서울숲 가족마당에서 열린 ‘비그림파워코리아와 함께하는 2024 서울시향 파크 콘서트’에서 가수 규현과 서울시향 협연 무대 편곡자도 이나일이다. 서울시향과는 연간 3~4회 콜라보 작업을 해오고 있다. 앞으로 클래식 편곡도 많이 할 예정이다.

“풀 오케스트라와 역량있는 가수가 함께 하는 공연 편곡을 해보고 싶습니다. 클래식 무대에 새롭게 올릴 수 있는 편곡 작업들, 예를 들어 첼리스트인데 피아노 반주로 태연 곡을 연주하고 싶다거나 등등. 저는 클래식과 가요의 중간에 있는 사람이라는 데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따라서 이렇게 관계된 일은 돈을 떠나서 정말 많이 하고 싶어요.”

이나일은 대학 시절 스페인 배낭여행에서 깊은 인상을 받아 라틴 살사에 관심을 갖게 된 이래 30대까지 라틴 살사 댄스에 푹 빠져 살았다. 살사 대회에 출전해 인기상도 받기도 했다. 2010년대 초 살사 앨범도 발매했다.

싱글 이나일에겐 3년 전부터 애완견(프렌치불독)이 남편이자 친구다. 애견이 배고프다고 아침 잠을 깨우는 게 오전 8시반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8시반이 기상 시간이 됐다. 1주일에 2회 학교에 가고 일주일에 1회 첼로 레슨을 받는다. 이나일은 현재 숙명여대 음대 대학원에서 첼로를 전공 중이다. 오전 11시쯤 작업실에 도착해 편곡 관련 일을 하고 저녁 6~7시에 퇴근하는 사이클의 연속이다. 어딜 가든 우리의 프렌치불독과 함께 한다.

“현에만 국한돼 있지 않고 풀 오케스트라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기술적 감성적 지평을 연 스페셜리스트, 국내 오케스트레이터의 한 획을 그은 ‘오케스트레이터’로 기억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