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zine] 월출산과 영산강이 만나면, 영암 ②

연합뉴스 2024-10-17 10:00:41

영산강이 남긴 위대한 유산

(영암=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영산강은 백제 이전의 연합정치체제였던 마한 문화를 잉태했다.

영암 출신인 고대 학자 왕인 박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아스카 문화를 꽃피우게 했다.

영산강 유역의 구림마을은 2천200년의 역사를 가진, 호남의 3대 명촌이다. 국토의 젖줄 영산강이 남긴 유산들은 위대했다.

◇ 강 등대를 본 적 있나요?

바다가 아닌 강에 세워진 등대를 본 적 있는가. 영암 멍수등대와 나주 영산포 등대는 영산강에 세워진 등대이다.

보기 드문 강 등대들은 영산강이 어떤 강인지 말해준다.

멍수등대는 목포에서 20㎞쯤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간 지점의 강 한복판에 세워져 있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물길의 바닥에 암초가 있어 작은 배들이 이를 피해 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주 영산포는 바다에서 약 50㎞ 들어간 영산강 하항이었다.

만조 때 바닷물은 강물을 밀어 올려 영산포를 지나 내륙 쪽으로 20여㎞를 더 들어갔다.

덕분에 영산포까지 배가 운항할 수 있었다. 영산포에 등대가 세워진 이유이다. 영산강은 만조 때 바다를 방불했다. 강 등대는 만조 때 내해로 변하는 영산강의 특수성이 낳은 시설이다.

1981년 영산강 하굿둑이 완공되면서 바닷물은 더는 강을 치고 올라오지 않는다.

강과 바다가 자리바꿈을 했을 때 영산강은 수자원의 보고였다.

한반도 남부의 온화한 기후, 바다와 강과 평야가 제공한 풍부한 먹거리와 수로는 고대 영산강 유역에 독자적인 문명을 탄생시켰다.

◇ 한국의 기원, 마한이 번성했던 지역…영암

대한민국의 이름은 삼한, 즉 마한, 변한, 진한의 '한'에서 비롯됐다고 교과서에서 배웠다.

한국인들은 '한국'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됐던 삼한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거의 모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삼한 중 하나인 마한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다.

다만 광복 후 8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국학이 성장한 덕분인지 최근 늦게나마 마한도 학계의 관심을 받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영산강 유역 고고 자료를 발굴, 보전하기 위해 국립나주박물관이 2013년 건립된 데 이어 영암에는 국립 마한역사문화센터가 들어설 예정이다.

마한은 백제 시대 이전 및 동시대에 번영했던 고대 문명이다.

한강 이남부터 전남 해안까지,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일부와 호남을 아우르는 넓은 지역을 지배하던 54개 소국 정치연합체였다.

마한의 유적, 유물들은 특히 영암, 나주 등 영산강 유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영암에서 발견된 대표적 고대 유적은 신연리 고분군, 옥야리 고분군, 내동리 쌍무덤, 장동 방대형 고분 등이다.

영암에는 150여 기의 고대 고분이 40여군데에 산재해 있다.

마한 유적으로 추정되는 이 고분들은 신라, 백제의 것과 달리 네모 모양, 즉 장대형을 띠는 것이 대부분이다.

또 옹관묘가 출토되는 것이 특징이다. 전남 지역에서는 세계 최대 크기의 옹관이 발견돼 국내는 물론 해외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옹관묘는 유라시아 지역에 널리 분포하는 묘제이다. 옹관은 마한의 국제성과 국제 교류를 시사한다는 게 학계의 시각이다. 총길이 3m, 무게 300㎏에 이르는 대형 옹관을 굽는 것은 쉽지 않다.

옹관을 구워낸 마한의 기술은 한국 음식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독 제작 기술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연리에는 15기, 옥야리에는 28기의 고분이 분포해 있다.

내동리 쌍무덤에서는 금동관 장식에 사용된 옥, 영락이 발견됐다. 영락은 '달개'라고 불리는 얇은 금속판 장식이다.

장동 방대형 고분은 밑변 길이가 38m, 너비가 35m에 이르는 대형 무덤이다.

마한문화공원에는 고려 현종 때부터 바다에 제사를 지내던 사당인 남해신사가 재현돼 있었다. 남해신사는 강원도 동해에 있던 동해묘, 황해도 풍천에 있던 서해단과 함께 3대 해신제를 지내던 곳이다.

◇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구림마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인 마을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은 2천200여 년의 역사를 지녔다. 그 주인공은 호남 3대 명촌으로 불리는 영암 구림마을이다.

그러나 구림마을의 기원은 공인된 역사보다 훨씬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오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을 근처에서 선사시대 주거지와 유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구림의 오랜 역사는 젖줄인 영산강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월출산을 바라보고 있는 구림마을의 자랑은 주민자치 조직인 대동계이다.

지금도 마을에 큰일이 있을 때는 향약 성격을 가진 대동계가 다수결 등 민주적인 원칙에 따라 의사를 결정한다.

조선 명종 때 결성된 대동계는 전국의 동계가 일제의 탄압으로 없어진 일제강점기에 유일하게 살아남아 그 역사가 500년에 가깝다.

회원들의 집회 장소인 회사정은 3·1운동 때 독립만세의 기치를 올렸던 곳이기도 하다.

구림마을 6대 문중의 하나인 연주 현씨 종가에 있는 죽림정은 이순신 장군이 다녀간 정자이다.

이순신이 친척이었던 현덕승과 현건에게 보낸 편지에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유명한 구절이 등장한다. (곰곰이 생각건대 호남은 국가의 보루이며 장벽이니)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는 뜻이다.

왜군과 싸울 때 식량 보급 등 호남인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었으면 국가를 지킬 수 없었다는 의미이다.

이 편지가 포함된 서간첩은 '난중일기'와 함께 국보로 지정돼 있다.

마을 내 육우당에는 한석봉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떡 장수였던 어머니와 한석봉이 떡 썰기와 서예로 '모자 대결'을 벌였던 일화의 무대가 영암이다.

국사암은 풍수도참설의 대가인 도선 국사(827∼898)의 탄생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구림은 박제된 옛 마을이 아니다. 12개 마을로 구성된 구림은 여느 동네처럼 주민들이 생업에 종사하며 바쁘게 살아가는 생활 터전이다.

2013년 현재 구림에는 500여 가구, 1천1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또 구림에는 전통과 역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격조높은 현대 문화가 여행자를 반긴다.

영암 출신 재일 교포 사업가 하정웅(1939∼) 선생이 기증한 회화, 판화, 조각, 공예, 사진, 서예, 도자 등 3천800여 점의 미술품을 소장한 하정웅미술관에는 전국에서 관람객이 방문한다.

선생이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포항시립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국립고궁박물관, 조선대학교미술관, 숙명여자대학교 등에 기증한 미술작품은 1만여 점에 이른다.

기증품에는 이우환, 곽덕준, 곽인식 등 재일작가와 피카소, 샤갈, 달리, 루오, 앤디 워홀, 벤 샨 등 해외 유명 작가와 박서보, 김창열, 오승윤, 홍성담 등 한국 대표작가들의 작품이 망라돼 있다.

하정웅미술관은 매년 4회에 걸쳐 기증품들을 번갈아 가며 전시한다.

지난 7월부터 9월까지 열린 '고귀한, 나눔' 전시 작품 중에는 동양사상을 현대미술로 표현한 세계적인 작가 이우환의 '선으로부터'를 비롯해 마리 로랑생의 '여인', 벤 샨의 '코플란 신부' 등 걸작이 포함돼 있었다.

◇ 일본 아스카 문화의 '시조' 왕인 박사

왕인은 백제의 학자로 1천600여 년 전인 5세기 초 일본에 한자, 유교 등 한반도의 선진 문물을 전해 일본의 고대 아스카 문화를 꽃피우게 한 인물로 추앙받는다.

일본 왕이 학덕 높은 학자를 보내주길 청하자 백제 왕은 왕인에게 임무를 맡겼다. 왕인은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이 됐다.

왕인을 '한류의 원조'라고나 할까. 왕인 박사는 구림마을에서 태어났다.

한일 문화 교류사를 빛낸 왕인 박사의 인류 공동 번영 업적을 기리고, 그가 남긴 소통과 상생 정신을 세계 평화의 디딤돌로 삼기 위해 영암군은 관련 유적지를 조성했다.

유적지에는 내국인은 물론 일본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선사 시대 이래 전남 지역과 일본 사이에는 왕래가 빈번했다.

왕인이 일본을 향해 구림마을 상대포를 떠날 때 도공, 와공, 야공, 직공 등 많은 기술자가 동반했다.

상대포는 고대 서남권 지방의 국제 무역항으로 중국, 일본 등과 교역하던 영산강의 관문이었다. 통일신라 말 당대 최고 학자들인 최치원, 최승우, 김가기 등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항구이기도 하다.

월출산을 중심으로 한 영암에는 국보, 보물, 지방문화재 등 문화유산이 많다.

영암 일대가 선사 시대 이래 문화 중심지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4년 10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