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된 욕망과 희생의 여성…서울 버전으로 재탄생한 '탄호이저'

연합뉴스 2024-10-16 22:00:25

국립오페라단 45년 만에 전막 공연…현대적 연출로 진입장벽 낮춰

국립오페라단 '탄호이저' 속 한 장면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남자가 사방이 하얀 방 안에 홀로 앉아 있다.

붉은 머리를 한 욕망의 여신 베누스가 문을 열고 들어서 그를 바라보고, 곧이어 빨간색 슬립 차림의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남자를 에워싼다.

그는 거미줄에 걸린 한 마리 곤충처럼 이들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듯 신음한다. 낭만적인 선율로 시작한 오케스트라 선율은 어느덧 긴장감으로 고조된다.

남자는 고향을 떠나 베누스와 살고 있는 인간 탄호이저. 향락으로 가득한 삶에 지친 그는 인제 그만 신에게 회개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겠노라 선언한다.

오는 17일 개막하는 국립오페라단의 '탄호이저'는 현대무용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서곡 무대로 시작한다. 몸짓과 소품, 세트는 은유로 가득하고 무대 상단에는 배우들의 라이브 연기를 가까이에서 보여주는 흑백 영상이 띄워진다.

리하르트 바그너(1818∼1883)가 쓴 원작은 쾌락의 여신 베누스와 정숙한 여인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갈등하던 탄호이저가 세상의 지탄을 받다가 결국 구원받게 된다는 이야기를 그린다.

'바그너 입문작'으로 꼽히는 '탄호이저'는 구성이 간결하고 공연 시간도 비교적 짧은 약 4시간이다. 국립오페라단은 1979년에 이어 45년 만에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

국립오페라단 '탄호이저' 속 한 장면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 상임 연출가로 활동 중인 요나 김은 원작에 현대적 연출을 가미해 진입장벽을 낮췄다.

김 연출은 이번 '탄호이저' 공연을 '서울 버전'으로 명명했다. '탄호이저'는 드레스덴 버전(1845), 파리 버전(1861), 뮌헨 버전(1867), 빈 버전(1875) 등이 있는데, 김 연출은 바그너가 젊은 시절 연출한 드레스덴 버전과 파리 버전을 융합했다.

가장 큰 차이는 베누스와 엘리자베트를 서로 떨어진 인물이 아닌 한 인물에 내재한 두 개의 자아로 표현한 점이다. 원작에선 각각 욕망과 희생, 혹은 악과 선을 의미하는 두 여자가 실은 양면성을 지닌 한 사람이라는 해석이다. 베누스는 붉은색 드레스를, 엘리자베트는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있지만 그 위에 입은 외투가 같은 것은 이 때문이다.

베누스가 1막에서만 주로 등장하는 원작과는 달리 서울 버전에서 그는 3막까지 무대를 누빈다. 베누스와 마치 거울을 보듯 마주하거나 나란히 서 있으면서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요나 김은 "여성에 대한 바그너의 클리셰 작법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 클리셰를 다 깨려고 했다"면서 "다만 두 여성이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이 '연대'의 의미인지 '대립'의 의미인지는 관객의 해석 몫으로 남겨두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국립오페라단 '탄호이저' 속 한 장면

결말 역시 원작을 완전히 뒤집었다. 원작에선 엘리자베트는 기도하다가 죽고, 이를 지켜보던 탄호이저도 구원받은 뒤 죽는다. 하지만 '구원을 받는데 왜 죽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진 김 연출은 성악가들 앞에서 "이 작품에서 구원은 없다"고 못 박았다고 한다.

국내에서 인지도가 높은 작품은 아니지만 서곡과 2막의 노래 경연의 개시를 알리는 행진곡, 3막 순례자의 합창 등은 오페라 팬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곡이다.

탄호이저 역은 하이코 뵈르너와 다니엘 프랑크가 맡았다. 엘리자베트 역은 레나 쿠츠너와 문수진이, 베누스 역은 쥘리 로바르장드르와 양송미가 각각 소화한다.

공연은 20일까지.

ramb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