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몰래 셀카로 영정사진 찍어 놓았어”...한국가곡 사랑했던 이정식 전 CBS사장

데일리한국 2024-10-16 18:20:54
이정식 전 CBS 사장이 향년 70세로 16일 별세했다. ⓒ유족 제공 이정식 전 CBS 사장이 향년 70세로 16일 별세했다. ⓒ유족 제공

[데일리한국 민병무 기자] 이정식 전 CBS 사장을 마지막으로 본 날은 여름비가 오락가락하던 지난 7월 23일이다. 1년에 서너 차례씩 정기적으로 만나 점심을 먹었다. 이날은 서울 구로디지털단지역 근처에서 옛 직장동료들과 함께 만났다.

서울문화사 부회장에서 퇴임한 직후 대장암에 걸린 것을 알았다. 어느새 암이 간과 폐로 번졌지만 대장암 수술 뒤 꾸준히 치료를 받았다. 의지가 강했다. 말 못할 불편이 셀 수 없이 많았겠지만, 겉으로는 건강했을 당시의 생활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늘 활기차게 생활했다. 긍정적 마인드도 똑같았다.

그런데 그날은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살짝 무거웠다. “이달 초에 병원을 갔더니 의사가 ‘더 이상 항암 치료를 계속할 방법이 없다’고 포기선언을 했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담도 쪽으로도 암이 전이돼 특히 통증이 심하다고 설명했다. 밤에 잠자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정식 사장은 러시아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문학적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시베리아 문학기행’을 2017년에 출간했다. 2020년 4월 대장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시작한 후에는 더 열성적으로 글을 썼다. 41년간 언론계에 몸담았으니 그에게 글은 힘을 주는 비타민이었다.

이전에 쓴 원고와 새로 쓴 원고를 모아 ‘러시아 문학기행1 도스토옙스키 두 번 죽다’(2020년 7월)와 ’러시아 문학기행2 도스토옙스키 죽음의 집에서 살아나다’(2021년 1월) 두 권을 냈다. 그 뒤 코로나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건강 문제 등 여러 사정이 겹쳐 운신에 제약을 받으면서도 그동안 써 둔 여행기를 모아 ‘여행작가 노트’(2021년 11월)를 내놓았다.

50여 차례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몸을 괴롭히는 각종 부작용은 쉼 없이 계속됐다. 다행스럽게도 외부활동이 아닌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7월 초 담당 의사가 이 방법 저 방법 다 써봤지만 최근 임상시험 약도 내성이 생겨 줄어들었던 암세포가 다시 커진 이상 다른 치료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고, 사실상 손을 놓겠다는 말을 하자, 지난 4년 이상 지니고 있었던 희망의 불꽃이 한 순간 꺼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점심을 먹으면서 책 이야기를 많이 했다. ‘톨스토이의 가출’이라는 제목으로 새 책을 펴낼 예정인데, 여기 약속 장소에 나오기 전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책 말미에 ‘후기’를 붙일 계획이라고 알려줬다. 그러면서 프린트한 원고를 건네줬다. 공식 출판되기 전에 한번 읽어 보라며 ‘후기’를 미리 보여준 것. 울컥했다.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이게 마지막 책이 아니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톨스토이의 가출’은 348쪽으로 출간됐다. 339~348쪽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이정식 작가가 열두번째 저서 ‘톨스토이의 가출’을 출간했다. 표지 사진은 모스크바 톨스토이 박물관에 있는 톨스토이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정식 작가. ⓒ황금물고기 제공 이정식 작가가 열두번째 저서 ‘톨스토이의 가출’을 출간했다. 표지 사진은 모스크바 톨스토이 박물관에 있는 톨스토이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정식 작가. ⓒ황금물고기 제공

이정식 사장은 ‘톨스토이의 가출’이 출간되자마자 집으로 보내줬다. 그리고 9월 27일 문자를 받았다. “잘 지내? 책은 받았는지? 나는 어제도 응급실에 갔다 나왔어. 후기에 내 상태를 설명했지만, ‘생사의 갈림길에 쓴 12번째 저서’라는 내용으로 책 소개를 해도 좋을 것 같네. 건강하게 잘 지내시게.”

그의 말대로 이라는 제목으로 책 소개를 했다. 집을 뛰쳐나가 열흘 후 숨진 82세 대문호의 파란만장 생애를 문학에세이 형식으로 썼으며, 저자의 암투병기를 다룬 9쪽 분량의 후기는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고 썼다. 10월 5일 문자를 받았다. “고생했어. 고마워.”

1954년 서울에서 출생한 이정식 사장이 16일 서울 목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70세. 7월 23일 마지막 만남에서 그는 특별히 당부의 말을 건넸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언론인으로 기억하겠지만, 자네라도 나를 한국가곡을 사랑했던 사람으로 알려줬으면 좋겠어.”

그는 노래를 잘 불렀다. 무대에도 자주 섰다. CBS, 뉴스1, 서울문화사의 CEO로 일할 때는 대규모 한국가곡 음악회를 자주 열었다. 가끔 같이 차를 타고 이동할 때면 낮은 바리톤 음성으로 ‘아무도 모르라고’(임원식 시·김동환 곡)를 흥얼거렸다. “떡갈나무 숲속에 졸졸졸 흐르는/ 아무도 모르는 샘물이길래/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지요/ 나 혼자 마시곤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는 이 기쁨이여” 이제 이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안타깝다.

이정식 애창가곡 1~4집을 내는 등 프로급 실력을 뽐냈다. 또한 한국가곡을 만든 시인과 작곡가의 숨겨진 스토리를 다룬 을 썼다. 한국가곡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다룬 책이다. 많은 성악가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더 이상 치료를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뒤 이정식 사장은 직접 양복과 넥타이를 골라 아내 몰래 셀프 영정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인화해 액자에 넣어 집으로 배달되게 했는데 아내에게 들켜 난감했다는 말도 털어 놓았다. 

고인은 경복고와 서울대 사범대 지구과학과를 졸업했고, 홍콩대 중국어문과정을 수료했다. CBS, KBS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CBS 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사장을 거쳐 CBS노컷뉴스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한국방송협회 부회장,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 예술의전당 이사, 뉴스1 사장 및 부회장, 서울문화사 부회장을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고옥주 씨(시인)와 아들 이승호 씨(작곡가·음악감독)·이승찬 씨(직장인), 며느리 김현정 씨(배우)·오유진 씨(하버드의대 박사연구원)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이며, 발인은 18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