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임철우·보르헤르트·린드그렌…한강이 읽은 책들

연합뉴스 2024-10-15 16:00:25

노벨문학상의 세계 일군 자양분…아버지 한승원에겐 자연·생태에 관한 책 선물

조해진·김애란 등 동시대 한국 작가 최신작들도 읽어

한강 작가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한강 작가는 무슨 책을 읽고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한국의 작가였던 한강이 한국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세계의 작가'의 반열에 오르면서 한강이 쓴 작품들은 물론 그가 평소 인상 깊게 읽었다고 언급한 책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도스토옙스키, 보르헤르트 등 근현대 러시아·독일 소설부터 5월 광주를 다룬 임철우, 스웨덴 아동문학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에 이르기까지 그의 문학 세계에 자양분이 된 책들을 추려 소개해본다.

한강 작품들을 꼼꼼히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그가 소개하는 독서 목록에서 한강이 일군 문학세계의 실마리들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 10년 전 인터뷰서 '내 인생의 책' 5권 꼽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책들은 2014년 네이버의 연속 기획 '지서재, 지금의 나를 만든 서재'에서 언급한 독서 목록이다.

한강은 당시 '내 인생의 책' 5권으로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스토옙스키) ▲ 어느 시인의 죽음(파스테르나크) ▲ 이별 없는 세대(볼프강 보르헤르트) ▲ 케테 콜비츠(카테리네 크라머) ▲ 아버지의 땅(임철우)을 제시한다.

소설가 임철우와 소설집 '아버지의 땅'

다섯 권 중 유일한 한국 작가인 임철우의 단편집 '아버지의 땅'은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과 1980년 5월 광주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한국의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인간의 불안과 슬픔, 분노 등의 심리를 깊이 파고든 작품이다.

한강은 이 소설집을 중3 때 읽었다면서 "완벽주의에 가까운 문장들에 놀랐다"고 했다. 특히 단편 '사평역'에 대해선 "분위기만으로 소설을 끝까지 밀고 가는 독특함이 좋았다. 언젠가 이렇게 독특한 방식을 가진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불러일으켜 줬던 소설"이라고 극찬했다.

'아버지의 땅'은 소설가 임철우가 1984년 펴낸 그의 첫 소설집으로, 작가는 후에 1980년 5월 광주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광주민주화운동의 전 과정을 다섯 권짜리 장편 '봄날'을 쓴다.

'봄날'의 단초가 담긴 '아버지의 땅'은 5월 광주를 다룬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와도 맥락이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한강이 10대부터 20대 중반까지 꾸준히 읽었던 작가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작가로 자주 소개했던 러시아 문호다.

한강은 당시 인터뷰에서 "감성이라든지 사람의 내면을 뚫고 들어가려는 의지 같은 것을 보며 충격도 받고 영향도 받았다"고 했다. 특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해 "이렇게 철저하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파고들어서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으면서 소설을 써낼 수 있다는 것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고 소개했다.

도스토옙스키 장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별 없는 세대'는 나치즘과 2차 대전의 실상을 겪고 1947년 스물여섯에 요절한 독일 작가 보르헤르트의 유작이다.

한강은 이 단편집이 "뭔가를 이루어보겠다는 마음 없이 마치 혼자서 성냥불을 켜보고 그게 꺼지는 걸 들여다보는 것 같은 그런 짧고도 내밀한 그러면서 아주 따뜻하고 진실한 기록들"이라고 했다.

한강은 이 5권 외에 추천 도서로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 ▲ 이것이 인간인가(프리모 레비) ▲ 국가(플라톤) 등도 소개했다.

현대 증언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히는 '이것이 인간인가'는 이탈리아의 유대계 화학자였던 저자가 2차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보낸 열 달간의 체험과 관찰을 기록한 책이다. 극한의 폭력과 공포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유머를 잃지 않는 위대한 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작별하지 않는다'나 '소년이 온다' 등 한강 작품 전반에 흐르는 휴머니즘과 맥이 통한다.

◇ 노벨상 발표 직후 언급한 린드그렌 '사자왕 형제의 모험'

노벨문학상 발표 직후 노벨위원회가 공개한 한강의 전화 인터뷰에서 언급된 '사자왕 형제의 모험'도 빼놓을 수 없다.

스웨덴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과 장편동화 '사자왕 형제의 모험'

'말괄량이 삐삐'를 쓴 스웨덴의 국민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의 작품이다. 연약한 소년 칼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악에 맞서는 사자왕 요나탄 두 형제가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감행하는 모험을 그린 판타지 동화다.

한강은 2017년 노르웨이의 문학 행사에 참석해 열두 살에 읽은 이 동화를 통해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폭력적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했다면서 이 책이 자기 내면에서 1980년 광주와 연결돼 있었다고 말했다.

한강이 아버지인 소설가 한승원에게 선물해준 책들도 최근 공개돼 화제가 됐다. 메리 올리버의 '긴 호흡'이나 로빈 윌 키머러의 '이끼와 함께' 같은 책이다.

'긴 호흡'은 미국 시인 메리 올리버가 쓴 산문집으로, 작가는 흘러가는 계절 속 요동치는 자연의 변화를 빈틈없이 포착하면서 자연과 삶, 예술과 문학에 대한 통찰을 견고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낸다.

올해 초 한강은 부친에게 이 책을 선물하며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편지에 적었다.

메리 올리버 '긴 호흡'과 이 책을 아버지에게 선물하며 한강 작가가 쓴 편지

'이끼와 함께'는 북미 원주민(인디언) 출신 식물학자인 저자가 이끼의 생태를 관찰하며 얻은 깨달음을 담은 책이다.

쉽게 눈에 띄지도, 꽃을 피우지도 않는 이끼는 그래서 척박한 환경을 견디고 다른 생명이 살 터전이 되기도 한다. 폭력과 억압으로 상징되는 육식을 거부하고 차라리 식물이 되어버리기를 택하는 여성의 이야기인 '채식주의자'처럼, 가녀리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식물에 대한 작가의 애착을 엿볼 수 있다.

◇ '빛과 멜로디'·'이중 하나는 거짓말' 등 국내 최신작도 섭렵

한강이 최근 읽은 책들은 노벨상 발표 직전에 한 매일경제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인터뷰에 따르면 작가는 소설 '빛과 멜로디'(조해진), '이중 하나는 거짓말'(김애란) 등 동시대 한국 여성 작가들의 신작 장편소설들을 읽었고, '읽어버린 것들의 목록'(유디트 샬란스키), '루소의 식물학 강의'(장자크 루소)를 번갈아 읽고 있다고 한다.

특히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는 후배 작가들의 최신작들을 먼저 언급한 것이 눈에 띈다.

김애란의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고교 2학년 세 친구의 비밀을 통해 우정, 거짓말, 죄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 성장소설이고, '빛과 멜로디'는 넷플릭스 영화 '로기완'의 원작 '로기완을 만났다'를 쓴 조해진이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소재로 전쟁과 평화에 대한 윤리적 질문들을 섬세하고도 묵직한 시선으로 써낸 장편이다.

모두 작가의 동시대 작가들에 대한 애정과 평화, 성장, 관계, 사라져가는 것과 연약한 존재들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엿보이는 책들이다.

한강은 노벨문학상 발표 직후 노벨위원회와의 전화 인터뷰에서도 한국 문학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어릴 때부터 책과 함께 자랐고 한국 문학과 함께 성장했다고 할 수 있어요. 한국 문학 독자들과 동료 작가들에게 좋은 소식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yongla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