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32] 권대근 '집중하기, 찌르기, 솎아내기'

데일리한국 2024-10-14 21:56:56
권대근 문학평론가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권대근 문학평론가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글쓴이의 흔적이 담긴 수필에는 작가가 사무치게 갈구하는 명작에 대한 그리움의 숨결이 반영되어 있다. 글에 무늬가 있어서 멀리 가는 글, 그런 글을 꼽으라면 평자는 남정언의 수필 을 뽑겠다.

남정언의 은 올림픽의 환호를 글쓰기와 연결시켜 풀어낸 수작이다. 수필이란 어떤 글일까를 변용의 시학으로 잘 나타내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수직적 글쓰기의 원리를 정말 기가 막히게 잘 묘파하고 있는 이 글은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고뇌의 흔적과 고심했던 얼룩이 군데군데 배어나온다.

발단부는 '양궁'의 백발백중의 '텐텐텐'으로 시작해서 인류의 역사를 바꾼 '총 균 쇠'를 '총 칼 활'로 구체화하고 다시 '사격 펜싱 양궁'으로 치환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글쓰기 메카니즘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몸풀기작업인 워밍업 단계에서부터 감탄사가 이어진다.

이 수필의 압권은 수필의 창작과정을 '총, 집중하기' '칼, 찌르기' '활, 솎아내기' 삼단 구조로 열고, 다시 열정기, 권태기, 성숙기로 변용한 데 있다. 라캉의 욕망의 3단계 상상계, 상징계, 실제계를 연상하게 하는 이런 전이 기술은 글쓰기의 험난한 여정을 단계적으로 구체화해 잘 보여준다.

수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제나 제재의 단일화다. 하나로 모아진 결상에 집중해야만 수필이 된다. 그녀는 독자들이 잘 이해하도록 글쓰기의 그 어려운 과정을 사격에 비유하고, 권태기에 접어들었을 때 사격 선수의 눈빛을 보면서 권태로움을 극복했다.

'칼, 찌르기'에서 그녀는 글쓰기의 두 번째 단계를 '역동적으로 빨리 상대를 향해 정확하게 찌르는 선수가 승리한다'는 펜싱 경기 룰에 빗대어 "수필가도 검객이다. 주제에 맞는 적확한 단어를 찾아 문장을 다듬고 정확한 지점에 그 단어를 찔러 넣어 문맥을 살려야 한다"고 하면서, 전문검객이 되기 위한 전략을 세 단계로 정리한다. "글쓰기에 왕도는 없다. 빨리 쓰기도 필요하고, 독서 후 내 것으로 새기는 과정도 거치고, 사전을 찾고, 재빨리 단어와 문장을 매만지는 수고를 가뿐히 감수해야"만 전문 검객으로 재탄생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솎아내기를 활쏘기에 비유하는데, "주제가 흔들리는 시행착오를 줄이고 수없이 다듬어야 읽을 만한 글 한 편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신의 경지'란 어구는 솎아내기의 중요성을 극대화하는 말이다. 여기에 반성적 성찰을 더해 수필의 특성과 매력을 얹었다. '내 경우'로 시작되는 부분이다. 퇴고 과정을 고통스럽게 생각했고, 사유를 정리하는 과정을 소홀하게 여겼고, 글을 완성하려는 열정은 과하지만 성숙하게 다듬어야 할 시간을 권태로 여겼다는 그녀의 아픈 고백이 문장에 파란을 일으키면서 남정언의 수필론은 정언명제의 화살이 되어 수필시학을 정확히 관통한다.

문장에 파란이 없으면 여인에게 곡선이 없는 것과 같다. 수필은 담론층에서 주제를 잘 마무리해야 되는 글이다. 그녀는 결말부에 가서 수필을 총 칼 활에 빗대어 그 핵심을 잘 파악한 지금을 열정과 권태를 성숙시킬 수 있는 '기막힌 순간'으로 의미화함으로써 글쓰기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잘 녹여내었다. 

◆권대근 주요 약력

△경남 남해 출생 △'동양문학' 수필 등단(1988) △'문예사조' 문학평론 △'경북신문' 문학평론 △'중앙일보' 수필 신춘문예 당선 △현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한국본격문학가협회 회장 △국제PEN한국본부 부산지역위원회 명예회장 △평론집 '수필은 사기다', 번역서 '한국의 명수필', 문학이론서 '문장가로 가는 길' △수필집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등 25권 △부산수필문학상, 부산펜문학상, 월강문학상, 여산문학상, 정과정문학상 등 수상

♣기막힌 순간-글/남정언

"텐! 텐! 텐!" 여자 양궁선수의 금메달에 이어 남자 양궁선수가 단체 금메달을 따는 순간이다. 연일 폭염으로 더위와 습도가 높아 열대야로 잠을 못 이루는데, 파리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획득한 순금 메달 소식 덕분에 기쁘고 고마워서 감동한다. 인류의 역사를 바꾸게 만든 '총, 균, 쇠'처럼 올림픽 '총, 칼, 활' 종목인 사격·펜싱·양궁에서 우뚝 선 드라마 같은 소식을 접한다.

올림픽 소식은 무더위에 절어있던 피곤함을 조금 떨쳐버리게 만든다. 국가대표로 출전한 선수들은 수천만 번의 훈련을 통해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인내심, 끝까지 해보겠다는 고도의 집중력으로 결국 황금밭을 일구어 내지 않았던가. '총, 칼, 활' 분야에서 집중하기와 찌르기, 솎아내기는 선수라면 누구나 겪었을 행복한 고된 과정이라 여길 것이다. 국가대표선수를 보며 그들의 열정기와 권태기, 성숙기를 나의 글쓰기와 견주어 본다.

총, 집중하기 사격은 집중이다. 공기소총 10m 부분에 역대 최연소 17세 반효진 선수가 금메달리스트로 등극했다. 사격에 입문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결선전 동점이 나오자, 슛오프 끝에 이겨버리고 한국 올림픽 사상 100호 금메달 선수가 되었다. 강심장을 가진 어린 선수의 열정은 사격 10발을 과녁에 집중하여 자신을 완성한 사례다.

수필가로 등단한 지 8년째다. 책 한 권을 갖고 싶은 열정으로 시작해 밤새우며 책을 읽고 자판을 두들기며 무엇에 홀린 듯 글을 썼다. 그러나 새 물이 들어오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글쓰기보다 과제에 몰입하면서 권태기로 접어들었다. 권태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겨우 뛰쳐나와 다시 글쓰기에 빠져든다. 과녁에 집중하는 사격 선수의 눈빛을 보면서 이 권태로움을 떨쳐내고 새로운 기록을 경신하기 위해 권총을 다잡아야 하지 않을까. 

칼, 찌르기 프랑스가 종주국인 펜싱은 올림픽 1회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개인전은 3분 3회전 15점을 먼저 내면 승리하는 경기다. 칼에 따라 플뢰레(팔과 머리 제외. 상체만 공격), 에페(결투. 전신 먼저 찌르기), 사브로(상체만 공격. 찌르기와 베기) 3가지 경기로 나뉘는데 선수의 기량과 정신력은 스피드와 전략에서 승부가 난다.

펜싱은 한 순간의 매력이 있다. 벨이 울리면 바로 상대를 겨누면서 찌르고 벤다. 누가 먼저 공격해서 찔렀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며 점수가 차곡차곡 쌓인다. 사브르 전에서 칼을 든 순간부터 허투루 찌르는 일은 없다. 역동적으로 빨리 상대를 향해 정확하게 찌르는 선수가 승리한다.

수필가도 검객이다. 주제에 맞는 적확한 단어를 찾아 문장을 다듬고 정확한 지점에 그 단어를 찔러 넣어야 문맥을 살려야 한다. 글쓰기에 왕도는 없다. 빨리 쓰기도 필요하고, 독서 후 내 것으로 새기는 과정도 거치고, 사전을 찾고, 재빨리 단어와 문장을 매만지는 수고를 가뿐히 감수해야만 전문 검객으로 재탄생하지 않을까.

활, 솎아내기 한국 양궁팀은 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궁 국가대표 선발은 나이·연령·경력을 무시하고 오롯이 실력으로만 선발한다. 국가대표 예선전은 올림픽 경기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예선 경기를 통해 선발된 선수는 파리 올림픽 경기장과 똑같이 만든 실전 훈련을 한다.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심장 없는 '슈팅 로봇'과 대결하면서 압박감을 제거한다.

경기장의 바람을 점검하고 실전에서 안정을 느끼는 심박수를 유지하면서 긴장하지 않는 평정심으로 탁월한 기록을 세운다. 대표선수들은 올림픽에서 한 세트도 내어주지 않고 자신을 믿는 성숙기에 접어들었다. 양궁선수를 지켜준 양궁협회는 '지원하되 관여하지 않는다'는 투명하고 부정 없는 룰을 지켜왔다.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함께한 배경이야말로 양궁 세계를 십 년 제패할 수 있는 마중물이었다.

올림픽 금메달은 하늘이 만든다는 말이 있다. 대회 당일의 풍속과 선수의 컨디션이 어우러져야 가능하다. 현재 올림픽 신기록을 가진 여자 양궁은 10연패, 남자 양궁은 3연패 세계 정상을 지키고 있는데 그냥 그저 만들어진 실력이 아니다. 우리 민족은 원래 활을 잘 쏘는 민족이며 거기에 초유의 능력을 갖춘 선수들은 10점 과녁에서 멀어진 화살촉을 솎아내며 자신만의 신화를 쓸 수 있는 자부심이 강한 선수들이다.

글을 쓰려면 글감을 정하고, 개요를 잡고, 초고 내용을 보충하며 다듬고, 불필요한 부분은 솎아내는 과정을 되풀이해야 한다. 주제가 흔들리는 시행착오를 줄이고 수없이 다듬어야 읽을 만한 글 한 편이 완성된다. 내 경우 개요와 초고는 무난한 편인데 충분히 솎아내는 퇴고 과정을 고통스럽게 생각해 왔다. 사유를 정리하는 과정을 소홀하게 여겼고, 글을 완성하려는 열정은 과하지만 성숙하게 다듬어야 할 시간을 권태로 여겼으므로 좋은 글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과녁에서 멀어진 내용을 솎아낸 깔끔한 글이 결국 좋은 작가를 만들지 않을까.

파리 올림픽에서 획득한 메달을 다시 본다. 비록 내 글이 올림픽 메달권에 들지 않아도 올림픽 대회에 나갈 수 있는 선수로 거듭나야겠다고 생각한다. 글쓰기에 집중하면서 주제를 잘 찌르고 퇴고를 통해 생각을 잘 솎아내는 작가가 되고 싶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나의 열정과 권태를 성숙시킬 수 있는 기막힌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