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수필 공간] 박미경 수필가 '불온한, 사랑의 힘'

데일리한국 2024-10-14 08:44:36
박미경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이수진 제공 박미경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떠나고 싶다. 이 욕망의 순간은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의 유전자가 내 안에 존재함을 알게 한다. 발칸 여행을 준비하며 아르튀르 랭보의 시집 을 가방에 넣는다. 지상의 천국이라 불리는 크로아티아에서 이 시집을 읽을 것이다. 제목과 달리 노란색의 표지는 생의 긍정과 희망으로 다가온다.

힘찬 도움닫기의 동력으로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는 비상의 순간은 내겐 일종의 쾌락이다. 이륙한 비행기 창으로 솟아난 구름은 지상의 모든 것을 덮는다. 현실의 기억을 상실하는 아련한 이별이다. 잘 있거라, 번잡한 일상들이여, 관계들이여.

청 보랏빛 두툼한 800 킬로미터의 물결이 영화처럼 아득히 펼쳐진다. 아드리아해를 따라 드보르브로닉으로 이동하는 길에 나는 랭보의 시집을 펼친다. 온통 혼돈과 광기로 번뜩이는 시어들, 은 그가 사랑했던 열 살 차의 동성애인 베를렌과 유럽 등지에서 지낸 뜨겁고도 격렬한 사랑과 절망의 고백서다. 를 들고 랭보가 베를렌의 집으로 찾아가던 운명의 순간, 상상이나 했을까. 연인에게 권총을 겨누게 될 그들의 미래를 향해 지옥의 문이 열리던 것을. 그 혼돈의 사랑을 '내 생의 가장 빛나는 죄악'이라고 베를렌이 고백하게 될 것을. 

랭보는 여덟 살에 시를 쓰고, 19세에 절필하며 30대에 요절한 프랑스의 천재 시인이다. 시대를 앞서가는 시를 썼지만 방황과 방탕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내게 랭보는 시들한 일상에 불꽃을 던져주는 용광로다. 그를 떠올리면 등줄기에 서늘한 쾌감이 지나간다.

미지의 것, 생동하는 것을 찾으려는 도발적 충동과 격렬한 욕구는 어떤 제약이나 구속도 용납지 않았다. 랭보는 '모든 형태의 사랑, 고통, 광기를 스스로 찾아 그 독소를 내부에 흡수하여 정수만을 간직'하기를 원했다. 모든 감각이 뒤틀렸을 때 보여지는 새로운 사물의 모습을 시적 이상으로 삼았다. 동성애와, 압생트, 마약 복용까지 온갖 타락의 길에 빠졌던 지옥의 한철에서 그의 욕망은 타올랐다. 

그래서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천국의 한철도 보냈는지 모른다. 지옥 속에서 기쁨을 보았고, 시적 영감의 천국을 얻었다. 행복한 지옥, 랭보가 굴복한 이 극단적인 행보에서 나오는 에너지는 무엇일까. 미(美)란 사람을 절망하게 하는 것이라는 폴 발레리의 말로 설명이 될까. 정상과 정형만이 정답은 아니다. 그의 불온한 사랑에서 나는 힘을 얻고 비극의 찬란함을 맛보기도 한다. 내 안의 어느 세포에 랭보와 닮은 피가 끓었을까. 그를 통해 틀을 벗어난 해방을 느끼며 고독 속에 빛나는 영혼에 자주 매혹된다.

푸른 아드리아해의 강렬한 태양은 끝없는 바다 위로 자주 몸을 뉘인다. 해 질 무렵 보랏빛으로 한 몸이 된 차가워진 바다와 뜨거워진 노을은 서로 사랑하는 듯하다. 이것은 천국의 풍경일까, 지옥의 광경일까. 아드리아해에서 만난 태양과 바다에서 나는 랭보의 을 발견했다.

​다시 찾았다! 무엇을? 영원 그것은 태양과 섞인 바다이다                                           -랭보의 시 중

또 하나의 사랑이 기다린다. 다뉴브 강에 비친 황금빛 그림자가 클림트의 로 물드는 부다페스트의 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은 영화 의 사랑을 소환한다. 세체니 다리를 사이에 두고 '부다'와 '페스트'로 나뉘는 이 도시의 운명이 '글루미 선데이'를 예견한 것은 아닐까.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라즐로와 그의 연인 일로나, 피아니스트 안드리스, 세 사람의 운명적인 사랑.

"그녀를 잃느니 반쪽이라도 가지겠어" 라즐로의 이 불완전한 욕망은 얽힌 운명의 실처럼, 파멸을 향해 나아간다. 일로나를 가운데 두고 양옆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두 사람. 그 복잡한 감정선을 감춘 그들의 욕망은 서로를 갈라놓기도 하고 때로는 더 깊이 연결된다. 서로를 불태우고 파괴하면서도 뗄 수 없는, 사랑의 서사와 변주에 전율한다. 세 사람의 사랑은 불가능한 걸까. 사랑은 유일한 것만이 아름다울까. 안드리스가 작곡해 일로나의 생일 선물로 바친 의 곡조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을 자살로 이끄는 비극성을 드러낸다. 사랑이 갖는 천국과 지옥의 양면성을 보여주듯. 

'우울한 일요일/저녁이 찾아들고 있는 이 시간/ 나는 외로움을 어둠과 함께 나누고 있네' 고요한 감미로움 속에 무언가 파고드는 긴장감의 선율. 글루미 선데이의 비감 어린 곡조는 세 사람의 운명을 은유하듯 사무친다. 그 사랑이 처절한 파국으로 끝날지라도 아름다운 당위로 느껴지는 불온한 사랑의 힘. 세 사람이 머물던 세체니 다리에서 듣는 의 선율은 바람에 섞여 이방인의 가슴에 젖어든다. 

이국의 하늘아래서 열흘간 꿈을 꾸었다. 커튼을 열면 낯선 도시의 새벽 풍경이 고요히, 가득히 들어오는 순간을 사랑한다. 또 다른 하늘과 바다, 구름과 바람, 햇살이 주는 자유 속에서 생을 돌아보고 사랑을 추억했다. 

돌아오니 가을이다.

◆박미경 주요 약력

△서울 출생 △월간문학(1993) 등단 △수필집, 인터뷰 에세이집 외 △동포문학상, 월간문학 동리상 등 수상 △현재 대표에세이 동인, 한국문인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