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수필가 11인] 이춘희 '가을하다'

데일리한국 2024-10-13 16:36:41
사진=권영주 사진작가 제공 사진=권영주 사진작가 제공

소슬바람이 여기저기 붓질을 해댄다. 쪽물을 듬뿍 묻혀 하늘에 색을 입힌다. 치자 우려낸 물로 은행나무를 적시고 드넓은 논을 쓸며 지나간다. 홍화 물을 이파리에 흩뿌리니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가을이 번진다.

계절이 색과 더불어 오고 간다. 산야가 연두로 봄을 맞더니 초록으로 여름을 품고 황금빛으로 가을을 여문다. 연둣빛 새싹의 무모한 용기가 착실(着實)을 가져오고, 초록 잎의 짙은 욕망이 성실(成實)로 이어진다. 열매는 지나온 고통과 시련, 빛의 기억을 담아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벼 이삭이 황금색 옷을 입고 씨앗이 영글었음을 속삭인다. 사과의 붉은 열매는 달콤하니 어서 먹어 보라고 꼬드긴다, 초록 침을 빳빳하게 세우고 철옹성 같던 밤송이도 갈색을 덧입혀 경계를 지운다. 심지어 틈까지 벌려 윤기 나는 아람을 살짝 내보인다. 모두 한해살이를 마무리하는 몸짓이다.

동살 몇 번 만났을 뿐인데 인생길이 서녘 하늘 아래다. 쪽빛 하늘이 불그스름하게 물든다. 노을 아래 세 여인이 휘적휘적 걸어간다. 뒤따르는 그림자도 흐느적흐느적한다. 바닥 넓은 운동화를 신었음에도 걸음이 기우뚱거린다.

인생의 봄, 교정에서 저들의 발걸음에는 얼마나 힘이 찼던가. 굽 높은 구두는 땅과 닿는 면적도 좁았다. 손톱만 한 굽 위에 몸을 올리고 또각또각 소리내며 꼿꼿하게 잘도 걸었다. 그렇게 당당하던 자태는 어디로 달아났을까. 수분과 정열이 빠져나간 뒷모습에 누렇게 마른 벼 줄기가 어른댄다.

희야는 자그마한 키에 몸피도 약할뿐더러 마음마저 여리다. 가녀린 줄기를 이리저리 눕히며 비바람을 이겨내는 벼처럼 그녀는 이런저런 일을 잘도 견뎌냈다. 그녀의 마음 주머니는 양보와 배려로 불룩했다. 동물 해부 실험이 끝나면 누구보다 먼저 피 묻은 접시와 도구를 씻었다. 둘러앉아 차를 마시다가 찻물이 쏟아지면, 제일 먼저 휴지를 들고 달려오는 것도 그녀였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주변의 배경으로 산 그녀를 볼 때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 떠오른다. 남편의 사업이 울울창창 번성하고 자식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꽃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녀는 돈과 자녀를 대화의 마당에 올린 적이 없다. 희야의 마음 곳간에는 잘 영근 이삭이 그득하지 싶다.

숙이는 외모가 예쁘고 날씬했다. 그녀의 구두 굽 소리는 자신감 넘치게 또각거렸다. 찬사가 귀를 막아 그녀는 주변의 말을 듣지 못했다. 자기 의견이 적힌 깃발을 들고 우리가 따라오기를 바랐다. 결혼 후 가족과 크고 작은 충돌로 힘든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신앙에서 받은 처방으로 마음의 상처를 달래며 이해의 폭을 넓혀 갔다. 지금은 무료 급식소에서 허기진 이에게 밥과 정을 나눈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달콤하고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달렸을 것 같다.

영이는 가시 숭숭한 밤송이였다. 의견을 모을 때 반대가 한 명 있다면 그녀였다. 새 물건을 보면 장점보다 단점을 먼저 찾았다. 한때, 그런 그녀를 우리는 구석에 몰아넣기도 했다. 밤송이와 딱딱한 껍질, 보늬가 속살을 보호하듯 그녀는 자신을 꽁꽁 싸맸다. 교직을 갖고 순수한 아이들과 지내면서 그녀는 마음을 조금씩 열었다. 이제는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가슴을 활짝 펼쳐 보인다. 잔소리꾼 남편 이야기,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 오르는 아이들 이야기에 스스럼없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야무지게 해내는 그녀에게서 단단하고 달콤한 밤의 속살 냄새가 난다.

아마도 내 속에는 감이 열렸을 것 같다. 풋풋하던 시절, 나는 넓은 잎사귀 사이에 숨어 핀 노란색 감꽃처럼 무리 속에 묻혀 지내기를 바랐다. 겁이 많아 돌덩이 같은 열매를 맺어 밖에서 오는 자극에 경계부터 세웠다. 시간이 데려온 매서운 바람과 뜨거운 햇볕 덕에 단단하던 열매는 몰랑한 홍시로 변하고 있다. 푸른 하늘에 붉은 점을 찍는 용기도 생겼다.

모두가 곳간을 채우느라 바쁘다. 농부는 벼 이삭을 포대에 담고, 산까치는 개암나무 열매를 삼켰다가 여기저기 토해내어 묻는다. 곤줄박이와 다람쥐도 떨어진 도토리를 물어다 창고에 감춘다. 밤과 대추, 감이며 사과가 가지를 떠나 상자에 차곡차곡 쌓인다.

식물은 가진 것을 털어내고 동물은 가을을 거둬들인다. 식물은 겨울을 비워서 준비하고 동물은 겨울을 채워서 맞이한다. 가벼워짐과 무거워짐, 줄어들고 늘어남은 극과 극이라 생각되지만, 그동안의 결실을 거두어들인다는 '가을하다' 교집합으로 가진다.

통창을 보며 세 여인이 나란히 앉는다. 나도 뒤이어 자리를 잡는다. 창 가득 누런 곡식이 너울거린다. 노랑, 빨강, 고동색을 입은 친구들이 단내를 풍기며 창밖을 내다본다. 때로는 영이의 가시에 찔리고 숙이의 안하무인에 자존심이 꺾였다. 시기와 질투가 태풍처럼 몰아쳤어도 사십 년이 넘도록 우정의 열매를 키웠다. 아마도 가슴 깊숙한 곳에 든 진실(眞實)이 성실(誠實)로 이어졌으리라.

흐린 날의 기억을 털고 우정의 열매를 가을한다. 느닷없이 가슴에 허기가 찾아올 때, 세상살이에 상한 마음을 위로받고 싶을 때, 고된 마음을 내려놓고 맘껏 웃으며 행복에 젖고 싶을 때, 우리는 곳간의 문을 열고 열매를 하나씩 꺼내 먹으리라. ]

통창 안과 밖이 가을가을하다.

*아람-알밤의 옛말 *동살-새벽에 동이 트면서 훤히 비치는 햇살

이춘희 수필가. 사진=주간한국 제공 이춘희 수필가. 사진=주간한국 제공

◆이춘희 주요 약력

△대구출생 △'문장' 등단(2019)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당선(2022) △저서 '한 그루 나무, 서른 송이 꽃들' 공저 △대구문인협회, 문장작가회, 달구벌수필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