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부터 기호·문장형까지…미술작품에서 제목의 의미는

연합뉴스 2024-10-13 10:00:33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이름의 기술'전

(청주=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미술관에서 전시를 볼 때 많은 관람객이 작품을 보고 그 옆에 표기된 작품 제목을 확인하곤 한다. 그러나 모든 작품의 제목이 작품 감상이나 이해와 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작품에서 제목은 어떤 의미일까.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름의 기술'전은 미술 작품에서 '제목'의 의미와 역할에 주목한다.

전시는 미술관 소장품의 제목을 '무제'와 기호, 문장 등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각 유형의 제목이 붙은 소장품 37점을 소개한다.

세 가지 유형 중 가장 많은 것은 기호형이다. 올해 8월31일 기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1만1천560점 중 7.9%인 910점의 제목이 기호형이다.

기호형 제목은 난해하지만 간혹 특정 규칙을 따른 제목은 암호를 푸는 것 같은 재미를 주기도 한다. 김환기는 1960년대 이후 작품 제작 날짜와 일련번호를 작품 제목으로 썼다. 전시에 나온 김환기의 '3-X-69#120'은 1969년 10월(로마 숫자 X)3일 제작을 시작한 120번째 작품이란 의미다. 김도균의 별을 찍은 사진 작업은 별을 촬영한 장소의 좌표가 제목이 됐다.

또 다른 유형 '무제'는 소장품 중 5.3%(611점)를 차지한다.

'무제'는 관람객 입장에서는 일견 불친절하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작가가 관람객에게 무한한 해석의 권한을 주는 제목이기도 하다.

제목 유형도 시대를 탄다. '무제'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추상화에서 단순히 멋이나 유행으로 붙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물방울 화가' 김창열은 생전 인터뷰에서 "그 세대 딴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하면서도 뭔가 울림이 있을 것 같은 그런 제목으로서 무제를 달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서술적인 문장형 제목이 많이 등장한다. 미술관 소장품 중 1.3%인 145점이 문장형 제목을 갖고 있다.

전시에 소개되는 아르헨티나 작가 토머스 사라세노의 '4각형의 통 안에서 Nephila seneglensis 거미가 1주 동안 살고, cyrtophora citricola 거미가 2주 동안 살고, 이후에 어린 crytophora citricola 거미 4마리가 1주 동안 살았다. 이후에 거미줄이 잘 보이도록 잉크를 분사하고 450도를 회전하여 접착제가 붙은 종이로 눌렀다'는 작품 제작 과정 자체가 제목이다. 이 작품은 실제 거미가 만든 거미줄에 잉크를 뿌려 만들어졌다.

문장형 제목은 얼핏 기호나 무제보다 친절할 것 같지만 오히려 더 혼동을 주면서 작품의 특징을 더 강조하기도 한다. 2채널 영상과 접이식 매트, 나무, 테니스공 등으로 이뤄진 고바야시 고헤이의 영상 설치 작업에는 '세 개의 주름 돼지족발 끊임없이 굴러가는 로스트'란 제목이 붙었다.

작품에서 제목은 변할 수 있는 데이터이기도 하다. 청주관의 '보이는 수장고'를 통해 전시되고 있는 민경갑의 그림 '얼 95-2'는 원래 '산울림 95-2'라는 제목으로 알려졌지만 소장품 연구 조사를 통해 제목이 수정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19년부터 작품정보변경회의를 열고 있는데 연구 조사를 통해 이처럼 작품의 제목이 바뀌는 사례가 종종 있다. 전시는 내년 2월23일까지. 무료 관람.

zitron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