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2] 이경은의 독서에세이...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

데일리한국 2024-10-11 21:02:27
이경은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이경은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글의 서두를 무엇으로 시작할까 잠시 생각했다. 재즈? 글? 메시지? 인사말? 그의 잡학적 지식? 이토록 매력적인 책에 대한 찬사? 수식어가 줄줄 따라 나온다.

나는 이 말을 건네기로 한다. 세상사에 소소하게 또는 잡다한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울리고, 특히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 권하고 싶으며, 한 사람의 일상이 주는 기쁨을 충분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라고.

사실 나는 하루키와 잘 사귀질 못했다. 남들이 좋다는데 가슴에 쉽게 와 닿질 않아  낯설었다. 그러다 이 책을 발견했다. 이런, 이토록 매력이 넘치는 책을 모르고 있었다니. 나는 단박에 그에게 가까이 갔다. 이제야 그의 해변에 서서 바라본다.

자질구레한 잡문이라지만 나에게는 하루키의 '비늘'이다. 그 비늘이 싱싱하다. 겨드랑이에 숨겨진 날개가, 인간적인 호흡이 페이지마다 튕겨 나온다. 참 오래도 걸렸다. 그래도 잃어버리지 않고 버틴 덕에 접안(接岸)했으니 다행이랄까. 한 명의 작가를 이해하는 일이 세상을, 우주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줄 미처 몰랐다. 작가도 독자도 둘 다 버텨야 가능한 일이다.

하루키는 이십 대 중반에 자신이 번 돈과 친척 돈을 빌려 도쿄에 조그만 재즈클럽을 열었다. 그곳에서 7년간 일을 한 이유가 '아침부터 밤까지 재즈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데, 그 답변이 근사하다. 그런 마음을, 무언가에 대한 탐닉마저도 성실하고 진지하다면 무조건 믿어주고 싶다. 최소한 7년은.

무엇보다 '음악'에 시선이 맞추어져 있는 게 마음에 든다. '음악을 아는 작가라면  감성의 한 촉이 다르겠군' 나의 편애가 또 무작정 등장한다. 만약 음악에 빠져들지 않았다면 어쩌면 소설가가 되지 못했을 거라면서, 지금도 소설 창작의 방법론을 음악에서 배운다는 작가가 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그 말만으로도 무조건 통과이다.

"새로운 음은 어디에도 없어. 어떤 음에다 의미를 두면 다르게 들리지. 그때 진정으로 그 의미를 담은 음들을 주워 담는 거야" 라는 재즈피아니스트 텔로니어스 멍크의 말을 하루키는 이렇게 변용한다. "그 어디에도 새로운 말은 없어. 지극히 예사로운 평범한 말에 새로운 의미나 특별한 울림을 부여하는 게 우리가 할 일이야"

영화 를 '쇠 다리미'로 셔츠를 데리는 씬으로 기억하는 그의 모습에서, 찰스 디킨스의 을 '분수에서 물을 먹는' 장면으로 기억하는 쭈뼛한 내 어깨가 가벼워진다. 그 단순한 무심이 서로 통하다니, 별 일이다. 소소한 글들 속에서 재즈가 들려와 몸을 슬쩍 흔들어본다. '잡학'의 묘미가 펄떡댄다. 싱싱하다.

청어를 좋아한 그를 생각하며 농수산물 시장을 가야 할까, 청어구이 집을 찾아내야 할까, 숙주나물로 만드는 하루키 요리를 해 볼까 고민되는 나른한 오후이다.

사케에 청어구이를 먹으면서, 재즈 'Shinjuku twilight'을 흥얼대며 읽는 책!

◆이경은 주요 약력

△서울 출생 △계간수필(1998) 등단 △수필집 '내 안의 길' '가만히 기린을 바라보았다' '주름' 외 6권. △그 중 수필 작법집 '이경은의 글쓰기 강의노트', 포토에세이 '그림자도 이야기를 한다', 독서 에세이 '카프카와 함께 빵을 먹는 오후' △디카 에세이집 '푸른 방의 추억들' △한국문학백년상(한국문협 주관), 율목문학상, 한국산문문학상, 숙명문학상 등 수상 △현재 방송작가, 클래식 음악 극작가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