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 4색 문화 에세이-15]김귀선 수필가 '사랑도 거짓말이요'

데일리한국 2024-10-10 07:40:26
새 보금자리를 찾아 내려앉는 한 쌍의 학. 사진=손용기 제공 새 보금자리를 찾아 내려앉는 한 쌍의 학. 사진=손용기 제공

어둑한 새벽, 단독주택 골목의 작은 공터다. 이층집 난간에 매달린, 몇 집 건너의 외등이 희미하게 비출 뿐 사위는 고요하다. 그때다. 어스름을 밟고 형체 하나가 골목에서 나와 공터를 살핀다. 양 손엔 뭔가가 들렸다. 덩치로 보아 초등 고학년이나 중학 저학년쯤으로 보인다. 그는 높은 담벼락 앞에 다가서더니 오른팔을 끝대로 올려 벽에다 뭔가를 써나간다. 내친 김에 몸을 구부려 한 줄을 더 쓴다. 근처 개가 왈왈 짖기 시작한다. 후다닥 일을 끝낸 그가 두리번거리며 나왔던 골목으로 사라진다. 

그날 아침이다. ‘아이구 지랄도 대에도 한대이. 어언 놈이 우리 담삐락에다가 이따구 황~칠을 해놨노. 으응 으응’ 대문 밖을 쓸던 늙수그레한 여자가 빗자루를 흔들어가며 난리발악이다. 여기저기 개가 짖고 몇몇은 부엌 쪽문을 열고 공터를 내다본다. 여자는 발이 센 나일론 빗자루와 물 한 양동이를 들고 온다. 북북 담벼락을 쓸어댄다. 글씨는 지워지지 않고 물벼락에 옷만 젖는다. 씩씩거리며 여자가 대문 안으로 사라진다.

며칠 전, 단독 주택 골목에서였다. 지름길을 찾던 중에 헷갈려 그만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골목은 차 궁둥이도 비틀기 어려운 삐뚤빼뚤한 길이었다. 더운 날에 짜증까지 들러붙었다. 다행히 가까이에 돌아나갈 수 있을만한 공간이 있었다.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마지막으로 전진할 때다. 정면의 담벼락을 보고는 ‘큭큭!’ 나도 몰래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대로 차를 멈추고는 두 팔을 겹쳐 운전대에 얹은 뒤 그 위에 턱을 괴고 담벼락에 쓰인 글씨를 보면서 그렇게 온갖 상상을 해봤던 것이다.

‘누나 사랑해 ♡ 바람피지 마’ 발칙한 저 문구. 귀엽다고 해야 할까, 능청스럽다고 해야 할까. 요것 봐라. ‘바람 피지 마’라고 누나에게 경고까지 주다니. 요렇게 깜찍한 구절이라니. 생각할수록 곱살스럽다.

오래전에 썼나 보다. 빛바랜 페인트가 추억인 듯 아련하다. 얼마나 애가 탔으면 저렇게 동네방네 소문내버리려 담벼락에다 썼을까. 주인공이 좋아한 누나는 단발머리 여중생일까. 아니면 머리를 양 갈래로 곱게 땋은 여고생일까? 혹시 좋아하는 척, 순진한 가슴을 착각하게 한 앙큼한 누나는 아니었는지.  

공터의 담벽에 고백한 사랑 문구. 사진=작가 제공 공터의 담벽에 고백한 사랑 문구. 사진=작가 제공

사랑도 거짓말이요 님이 날 위함도 또 거짓말/ 꿈에 와서 보인다 하니 그것도 역시 못 믿겠구려/ 날 같이 잠 못 이루면 꿈인들 어찌 꿀 수 있나

이 몸이 학이나 되어 나래 위에다 님을 싣고 / 천만리 날아를 가서 이별 없는 곳 내리리라/ 그곳도 이별 곳이면 또 천 만 리

학이 되어 멀리 훨훨 날아 이별 없는 곳에서 둘이 살고 싶다는 소망, 애잔하다. 옛 분들은 어찌 사랑의 감정을 이토록 잘 풀어놓았을까. 전전긍긍 애타는 사랑이다. 주저앉아 끙끙거리기보다 억센 독수리 발톱에 매달리듯 과감하게 야반도주한 배짱 두둑한 사랑도 있었다. 그들은 나의 새댁시절 같이 곁방살이했던 부부다.

산골 처녀는 이웃 동네의 두 살 아래 총각과 정분 난 게 들통 날까 두려웠다. 오빠들이 알면 다리몽둥이 남아나질 않을 거라 방법은 한 가지, 멀리 도망치는 것이었다. 낯설고 물선 곳에서 밥숟가락 하나 살 돈 없이 살림을 시작했다니. 일하던 공장 한 편에서 쪽잠을 자고 매끼를 국수로 먹었어도 그게 고생인 줄 몰랐단다. 둘이 얼굴 마주할 수 있는 곳이 천국이었다.

"에구 그때는요 눈에 백태가 보얗게 끼이 가지고요 시집이 그케 몬 산다 케도 눈에 안 비디더. 둘 다 배운 게 있나 가진 게 있나. 무얼 믿고 그켔는지. 철딱서니가 없었지요. 옷 보따리를 미리 집 뒤 보릿짚 삐까리 새에 찡가 놨다가 달밤에 오십 리를 걸어 둘이 도망쳤다 아잉교. 그때 우리 아부지가 마이 아팠는데 그것도 눈에 안 비디더. 우짜든지 집에서 멀리 달아날 생각만 했으이" 키가 자그마하고 뽀얀 피부의 그녀는 부업으로 밤을 깎으면서 한숨을 쉬어가며 푸념했다.

사랑, 고것 참 복잡 야릇하다. 못 이루면 못 이뤄서 내내 미련이고, 이루면 또 이룬 대로 후회막급이니 그놈의 사랑 때문에 인생 글러버린 사람 수두룩 빽빽하겠다. 그런데 요상한 것은 그 머릿골 지끈지끈한 사랑에 목숨을 걸었다는 연애담을 들을 때면 왜 그리 멋있게 보이고 또 부럽기까지 하는지. 사랑에 거짓말 쪼매 섞은들 어떠랴. 융통성으로 보리라. 사랑! 삶의 심지이며 꽃봉오리이려니.

*노랫가락: 시조로써 부르는 가락

김귀선 수필가. 사진=작가 제공 김귀선 수필가. 사진=작가 제공

◆김귀선 주요 약력

△경주 출생 △계간 '문장' 수필 등단(2008) △계간 '창작에세이' 평론 등단(2014) △대구수필가협회 부회장 △계간 '문장' 편집국장 △수필집 '푸른 외출'